틈/누군가의 한 소절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윤후
2009. 10. 14. 22:03
김연수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1994년 장편소설[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굳빠이, 이상]으로 2001년 동서문학상을, 소설집[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2003년 동인문학상을,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로 2005년 대산문학상을, 단편소설 [달로간 코미디언]으로 2007 황순원문학상을, 단편소설 [산책하느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으로 2009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 장편소설 [7번 국도][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밤은 노래한다] 소설집[스무 살], 산문집[청춘의 문장들][여행할 권리]등이 있다.
내게 있어 그의 첫 번째 책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였다. 그때까지 나왔던 그의 모든 책을 읽었다던 학교 선배의 강력추천으로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그의 책을 꺼내들기 까지 나는 그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다. 선배의 추천 시기와 내가 2009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다 읽었던 시기가 얼추 겹쳤던 기억이 전부이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라는 책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의 그 소설집을 읽으면서 나는 주제나 의도 따위의 작가가 독자에게 내비치려는 생각들을 도저히 읽어낼 수 없었다. 당연히 그 소설집 속의 단편들도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어려운 내용이었다. 완독하기 부담스러운.
여튼, 그 책을 다 읽고 나는 김훈의 [자전거여행]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을 다시 느끼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사실 처음 김훈의 [자전거여행]을 읽었을 때의 절망감은 김연수의 것보다 두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알수없는 수사와 정확한 조사, 불분명한 실체를 표현하는 문장들이 어느것 하나 와닿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김훈의 광팬이 되었고 지금은 김훈의 글은 거의 모두 읽었다. 포기하려 했던 김훈의 세계에서 나는 김훈의 [개]로 시선을 돌렸다. 어우 쉬워라. 김훈 소설의 시작은 그래서 나는 [개]이다.
김연수도 마찬가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난해함의 갈증을 나는 [사랑이라니, 선영아]로 해소했다. 그 소설에서 나는 시간적인 유기성과 관계에 천착할 수 있는 그의 시선이 좋았다. 그래. 거기가 김연수 소설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그 이후로 세번째이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중간중간 [밤은 노래한다][굳빠이 이상][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등의 출간된 소설을 읽고 싶은 욕망이 솟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천히. 단편에서 부터, 혹은 접하기 쉬운 소재의 소설부터 시작하는 것이 작가관을 들여보기에 제일 적절한 방법임을 나는 알고 있기에 이번 신작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의심없이 내 지갑을 열게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름 성공적인 선택이었지.
개인적으로는 소설집 마지막 단편인(중편이라고 해도 무방한) [달로간 코미디언]이 제일 인상깊었다. 라스베이거스의 한 사막에서 실종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쫓아가는 그녀에게서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진정한 '소통'이 무엇인지, 타인에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이며 그게 가능이나 한 것인지 생각했고 또 힘들어 했다. 세상의 빛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딸, 시작장애인 도서관장을 만나 어둠과 심장, 그리고 밖의 나로 인식하는 세계를 경험하는 주인공 '나'. 그의 말처럼 "내가 너를 이해한다'는 말은 거짓일 지 모른다. '우리'라는 말 조차도.
11p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이야기다. 이 우주의 90퍼센트가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것들로 이뤄져 있다면, 결국 케이케이의 어린 몸도, 그 몸을 사랑했던 내 세포들도 달리 갈 곳은 없을 것이다. 나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그걸 보지 못할 뿐이다.
--------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中에서
81p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가 오래도록 살아 노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일생에 단 한 번은 35미터에 달하는 신의 나무를 마주한 나무학자 왕잔의 처지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룡과 함께 살았다는, 화석으로만 남은, 하지만 우리 눈앞에서 기적처럼 살아 숨쉬는 그 나무.
-------- '세계의 끝 여자친구' 中에서
92p
"그래, 오늘이 이 누나의 거룩한 서른번째 생일이란다. 이렇게 인생이 또 한번 꺾어지는 거지, 뭐. 어쩐지 하얀 꽃잎이 마구마구 떨어지는 걸 보는 나무가 된 심정이야."
98p
졸업한 뒤에는 꽃 택시 운전사가 되는 꿈을 이루겠다고 다짐하는 대학생은 많지 않을 것이다. 종현과 나는 대학시절 광고 동아리에서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끓어넘치는 마케터와 이 세상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 오직 만들고 또 만들 뿐인 영화감독을 서로 상상하며 만났다. 그 시절에 우린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우린 세상 모든 사람인 양 행동할 수 있었다. 언젠가 종현이 말한 것처럼 우린 하루 스물네 시간을 1440개의 아름다운 일 분들로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 입학선물로 받은 캐논 디지털 카메라를 늘 들고 다니던 종현에게 그 일 분이란 숨겨진 빛을 찾아내는 60초에서 세계를 가장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는 1000분의 1초 사이를 오가는, 우주만큼이나 광활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염없이 떨어지는 벚꽃잎들을 바라보며 하루 1440개의 아름다운 일 분들에 대해서 종현이 말하던 그 봄날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105p
"그건 그 남자 말이 맞아, 누나. 이 세상을 지배하는 건 우연이야. 시골이라면 자연이겠지만, 도시에서는 우연이야."
114p
······
그 다음에는 종현이 얘기했다. 택시를 운전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을 얼마나 하찮은 존재로 여겼는지,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어떻게 자신을 위로했는지, 또 옆좌석이나 뒷좌석에 앉아 있는 동안 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지, 어떤 경우에도 앞만 바라보면서 그저 냄새만으로 그 사람들이 먹은 식사와 그 사람들의 경제적인 상황과 그 사람들의 직업을 짐작하는 일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 그러다가 어느 날 새벽에 본 그 불길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얼마나 참혹했는지, 또 자신의 미래는 얼마나 어두운지에 대해서.
--------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中에서
135p
지금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지만, 눈이 내리고 있어 거리가 혼잡하니 귀가시간이 좀더 늦어질 수 있겠다는 아내릐 전화를 받고 나서야 나는 창밖에 눈이 내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안 노래하면 안 삽니다"라는, 이 친구의 말은 음정이 틀리면 누구도 피아노를 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연주하지 않는 피아노는 결국 죽게 된다는 뜻이라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아차렸다.
--------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中에서
176p
······
그 당시 내 인생이란 '읽어도 그만, 읽지 않아도 그만'인 책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180p
살아오는 동안 가장 인상적인 노을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엄마가 죽던 날의 노을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 노을이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내가 본 것과 같은 노을을 볼 수 없다는 점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남편도, 아이도, 오빠도, 여동생동도. 끝내 그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엄마를 떠나보낸 내게 그 사실은 얼마나 위안이 됐는지 모른다. 위안이라고는 말했지만, 그건 이해하기 어려운 삶의 순간들, 예컨대 엄마의 죽음과 같은 특정한 순간들을 그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체념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그런 탓에 누군가 내가 본 것과 같은 노을을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온 존재가 떨릴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그 사진들은 내게 "쉽게 위안받을 생각하지 말고 삶을 끝가지 쫓아가란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강렬한 경험에 비하자면, 남편의 느닷없는 질문은 내 눈썹 한 올도 흔들지 못할 만큼 시시했다.
198p
내 입에서는 그가 인용한 「기러기」라는 시가 흘러나왔다.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건너 100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꽤괘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그 한가운데 서서 나는 고개를 들고 흑두루미들이 선회비행을 마치고 들판으로 다시 내려어올 때가지, 철새들을 카운트했던 중학생들도, 그 광경을 지켜보기위해 새벽부터 몰려들었던 관광객들도 다들 돌아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날 때까지, 그 한가운데 서서 가만히 흐린 하늘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그 한가운데 서서. 노을을 기다리며.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새들을 볼 수 있을 때까지.
-------- '네게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中에서
232p
······ "그걸 소설로 쓸 수 있겠어요?"라고 묻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 특별한 행동이 바로 그 여자 때문에 나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슨 소리죠?"
"그 선수 말이에요. 라스베이거스에서 죽은 선수. 그 선수의 고통을 소설로 쓸 수 있겠어요?"
"고통에 대해서 직접 말하는 건 소설이 아니고, 에세이죠. 소설은 단지 작가가 아는 고통을 이야기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내가 죽음을 예감하는 그 권투선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난 소설로 쓸 수 있어요.
"그럼 다시 묻죠. 고통이 뭔지 이해할 수 있겠어요?"
"소설가에게 고통이란 자기가 쓴 소설을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해서 책이 안팔리는 일이지요."
그러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239p
우리가 살면서 겪는 우연한 일들은 언제나 징후를 드러내는 오랜 기간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설사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실연의 고통에 잠겨서 죽지 않고 살아나기 위해서는 그렇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예기치 않게 쏟아진 함박눈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시작된 우리의 사랑은 또 그만큼이나 느닷없이 끝나버렸다. 그녀에게서 이별 통고를 받은 뒤 나는 우울한 심정으로 긴 시간을 두고 그 이유를 알아내려 애썼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보름달을 배경으로 날아가던 부엉이를 바라보던 내가 감격에 젖어 청혼한 일 때문이 아니라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사랑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는데, 막상 별다른 이유 없이 헤어지고 나니 왜 지구는 자전 따위를 해서 밤이라는 걸 만들어내 나를 뜬눈으로 누워있게 만드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246p
"암튼 붙으면 고통이 없고 떨어지면 고통이 생기고, 그런 거야. 그래서 네가 내 곁에 없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던 거야. 곁에 없으면 소통이 안 되는 상황이고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야. 눈이 있어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못 듣는 처지가 되는 거지. 걔는 왜 그랬을까? 정말 이상한 얘잖아? 이해할 수가 없어. 한때 나 자신보다 더 친했던 사람에게 느기는 그런 의문 자체가 고통이라구. 여기 봐. 이렇게 바람이 불잖아. 여기 나무들 사이로. 그런데 네가 없으니까 이런 의문이 들더라. 왜 바람이 부는 거지? 이해가 안돼. 그래서 바람이 불 때마다 고통스러워. 손뼉을 치잖아. 짝짝짝. 그러면 소리가 나잖아. 왜 소리가 나는 거지? 이런 소리 자체가 고통이었어. 세상 모든게 고통이었어."
"그래서 오늘 말고도 길 가다가 가로수에 부딪친 적이 많았다는 소리야?"
"네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도 내가 알지 못하니까 고통인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캄캄한 어둠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니까 오늘처럼 어디 가로수에만 부딪치겠냐고!"
"그럼 또 뭐하고 부딪치는데?"
"바람소리하고도, 통닭 튀기는 냄새하고도, 하늘의 파란색하고도. 세상 모든 것하고 다 부딪치지."
268p
······
"무슨 일을 하시는 분입니까?"
갑자기 이관장이 내게 물었다.
"소설을 씁니다."
내가 말했다.
"소설가란 말씀인가요?"
"예"
"재미있군요. 얼마 전에 녹음한 책에 보니까 아프리카에서는 노인이 한 명 죽을 때마다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썼습니다. 그게 참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제 책을 읽을 수 없게 됐으니까 내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처럼 눈이 안보이게 되면 읽을 수 있는 책이 한정돼있거든요. 소설가는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으니까 소설가에 대한 책은 아직 읽어본 일이 없는 셈입니다. 이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 법이죠. 그러니 몇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소설을 써서 먹고살 만합니까?"
-------- '달로 간 코미디언'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