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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슬픔을 발견한 꼬마이야기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본문

틈/누군가의 한 소절

어느날 슬픔을 발견한 꼬마이야기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김윤후 2009. 7. 3. 18:51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어린왕자와 더불어 중고생 필독서로 불리는 책이었다. 어느해인가 책을 소개하는 공중파 방송에서 추천도서로 꼽히는 운으로 대중들에게 더 친숙해진 책이기도 하다. 불규칙한 게릴라성 집중호우로 산성비 뒤집어쓰기 쉽상인 미친 날씨 속에서 난 쉽게 읽을만한 책을 원했다. 지금 읽고 있는 경제서적이나 김훈의 시론집은 땀으로 젖은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의 끈적임을 참아가며 읽어볼만한 책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어들었다. 애기능 생활과학도서관의 이 책을.




" 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래야 실망도 안 하거든. 아기 예수도 사람들이나 신부님이나 교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좋은 애는 아냐"


제제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해하고 있다. 알고 있다라는 것이나 이해하고 있다라는 것이 제제의 나이와는 맞지 않는 신발같은 것이기에 제제는 조숙하다. 그 조숙함의 원인은 깊은 가난이고.


"그래서 난 아기 예수가 그냥 보이기 위해서만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해. 그 다음엔 부자들이 더 소용 있다고 깨달은 거야······. 이런 얘기 그만 하자. 내가 한 말은 큰 죄가 될지도 몰라."


제제는 누구보다 말을 먼저 깨우친다. 가르쳐 주는 이가 없음에도 혼자 글을 읽는다. 크리스 마스에 태어난 한 작은 악마 제제. 매일의 일상이 제제의 골탕거리다. 하지만. 제제는 황금같은 마음 씨를 가진 아이였다. 학교에 입학 한 후 제제는 얼굴이 못생겼다는 이유로 꽃병에 꽃이 꽂혀있지 않는 빠임 선생님의 꽃병에 매일 꽃을 꽂는다. 물론 남의 집에서 함부로 꺾어온 꽃이었지만.

제제만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이름은 밍기뉴다.


밍기뉴는 내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 주었다. 그러니 어떻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내 이야기를 듣고 속이 상했는지 내가 이야기를 끝내가 화난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비겁한 녀석들!"


하지만 제제 주변에서 너무나 이른 슬픔을 발견하게 된다. 제제가 밍기뉴만큼이나 사랑했던 뽀르뚜가 아저씨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용기를 주고싶어 아빠에게 부른 노래때문에 심하게 매를 맞아 정신적 쇼크로 심하게 앓게 된다. 무엇이 제제에게 그토록 시련을 주게 한 것일까. 가난은 때론 모든 것을 앗아간다.


"아기예수, 넌 나쁜 애야. 이번에야말로 네가 하느님이 돼서 태어날 줄 알았는데. 왜 나한테 이런 짓을 하는거야? 넌 왜 다른 애들은 좋아하면서 나는 좋아하지 않는 거야? 내가 얼마나 착해졌는데. 이제 싸움도 안 하고, 욕도 안하고 공부만 열심히 하는데. 볼기짝이란 말도 이제 안 한단 말이야. 그런데 아기 예수, 넌 왜 나한테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내 라임오렌지나무를 자른다고 했을 때도 화 안 냈어. 그냥 조금 울었을 뿐이야······. 이젠 어떡해. 이젠 어떡하냐구!"

······ 이제는 아픔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매를 많이 맞아서 생긴 아픔이 아니었다. 병워에서 유리 조각에 찔린 곳을 바늘로 꿰맬 때의 느낌도 아니었다. 아픔이란 가슴 전체가 모두 아린, 그런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비밀을 말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죽어야 하는 그런 것이었다. 팔과 머리의 기운을 앗아가고, 베개 위에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지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제제는 아픔을 알고 시련을 넘기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한 사람을 무력하게하고 속물같게 하고 감정없게하는 지. 제제는 그렇게 일찍 철이 들어버린다. 나는 철이 들어가는 제제의 하루가 저미듯 다가왔다.

시간이 훌쩍 흘려 나이가 지긋한 제제가 다시 말한다.


"우리들만의 그 시절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먼 옛날 한 바보 왕자가 제단 앞에 엎드려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물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사랑하는 뽀르뚜가, 저는 너무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라임오렌지나무의 색깔처럼 밝고 시큼하고 명랑한 책이 아니었다. 가난의 수레바퀴에서 세상을 빨리 알아버린 한 아이의 슬픈 기억. 나는 가난 했던가. 나는 세상에 철들었던가. 하루 종일 책의 여운이 그림자처럼 남아있다. 아. 이 책을 소개한 공중파 프로그램의 제목이 기억났다.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
모두들 이 책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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