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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 살아온 기적 / 살아갈 기적 본문

틈/누군가의 한 소절

장영희. 살아온 기적 / 살아갈 기적

김윤후 2009. 9. 3. 23:34
장영희 에세이. ('에세이'란 단어가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지 잠깐 생각했다.)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뉴욕 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대에서 1년간 번역학을 공부했으며, 서강대 영미어문 전공 교수이자 번역가, 칼럼니스트, 중·고교 영어교과서 집필자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문학 에세이 [문학의 숲을 거닐다]와 [생일][축복]의 인기로 '문학 전도사'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2003년에는 아버지 故 장왕록 교수의 10주기를 기리며 기념집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을 엮어 내기도 했다. 번역서로 [종이시계][살아있는 갈대][톰 소여의 모험][슬픈 카페의 노래][이름 없는 너에게]등 20여 편이있다. 김현승의 시를 번역하여 한국문학번역상을 수상했으며,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으로 올해의 문장상을 수상했다. 암투병을 하면서도 희망과 용기를 주는 글들을 독자에게 전하던 그는 2009년 5월 9일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작가의 책을 읽고 감상글을 쓰는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가끔 매스컴에서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암투병 중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때 조금 관심을 가져보고도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에세이'라는 문학 장르를 나는 좋아한다. 한 때 에세이를 써볼 요량으로 내 유년 기억들을 헤집어 보기도 했었다. 남들에게 교훈이 될만 한 경험들이 있나 하고 들여다 보다 교훈은커녕 욕이나 먹지 않으면 다행일 장난짓만 생각나서 컴퓨터를 껐던 일. 일부러 경험을 만들기 위해 바쁘게 사람들을 만나고 진창에서 과음도 하며 설익게 보냈던 대학 생활. 뒤늦게 알았지만 그런 일들은 전혀 '에세이' 작문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역시 진리는 내안에 있다.

그녀의 말대로 29세 '생신'선물로 나는 이 책을 받았다. 학교 자치도서관에 갔더니 나를 엄청 싫어하는 호(號)가 '유복'인 한 학우가 포장지에 곱게 싸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끝까지 '생신'이라는 표현을 썼던 그 후배. 책을 선물 받고 해줄 수 있는 보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다 선배의 충고대로 책 후기를 올려주는 것으로 보답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책의 내용은 내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미안해 하는 것인가?




150p
"자기 짝을 찾는 것은 인간의 뜻이 아니란다. 아기를 낳게 해주는 삼신할머니 알지? 삼신할머니가 엉덩이를 때려 아기들을 세상 밖으로 내보낼 때 새끼발가락에 보이지 않는 실 한쪽 끝을 매어 둔단다. 그리고 또 다른 쪽은 그 아기의 짝이 될 아기의 새끼발가락에 매어 두는 거야. 두 사람이 어떤 삶을 살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살아도 - 그래, 한 사람은 미국에 살고 또 다른 사람은 한국에 살아도 - 언젠가는 둘이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되고 시집 장가를 가고, 그렇게 영원히 함께 묶여 있는 거야"

 어렸을 때지만 그 이야기가 너무나 재미있고 신기하게 들려 나는 내 실의 다른 쪽 끝은 누구의 새끼발가락에 매여 있을까 꿈꾸어 보곤 했다.

159p
······
민식이의 글을 읽으니 얼마 전 전신마비 구족화가이자 시인인 이상열씨가 쓴 '새해 소망'이라는 시도 생각난다.
 "새해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게 하소서"

187p
······
에라, 그냥 장영희가 좋다. 촌스럽고 분위기 없으면 어떤가. 부르기 좋고 친근감 주고, 무엇보다 이젠 장영희가 아닌 나를 생각할 수 없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말한다.
 "이름이란 무었일까? 우리가 '장미'라 부르는 것은 그 어떤 이름으로라도 여전히 향기로울 것을"
맞다. 향기 없는 이름이 아니라 향기 없는 사람이 문제다.

191p
 남북 상봉이 이루어지는 호텔 밖에서도 드라마는 일어나고 있었다. 몸 앞뒤로 자신의 부로 친척을 찾는 팻말을 건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이북 기자님들'을 찾아 호소하고 있었다. 어떤 할아버지가 지금은 90세 된 어머니의 신상을 적은 팻말을 목에 걸고 있는 걸 보고 우리 측 기자가 무심히 "지금쯤은 돌아가졌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는 눈을 크게 뜨더니 화를 벌컥 냈다. "우리 오마니가 와죽어요? 나이 구십에 사람이 죽는단 말이요? 별 말을 다 듣갔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억지이지만, 누가 그 억지를 나무랄 수 있을까.
 다시 이북으로 떠나기 전, 백 살 된 어머니를 돗자리에 앉히고 마지막으로 절을 올리며 어떤 아들은 말했다. "오마니, 통일 되어 아들 다시 보기 전에 눈을 감으면 안 돼요. 알갔시오? 그게 오마니가 해야 할 일이야요." 어머니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을 '오마니가 해야 할 일'이라고 자꾸 우기던 아들은 울며 떠났다.

196p
내가 아는 사람 하나는 오퍼상인가를 하면서 돈도 많이 벌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쓰겠다고 선언하고, 강원도 두메산골에 오두막 한 채를 지어 내려갔다. 떠나면서 그가 말했다.
"내가 나를 알지요. 이렇게 하지 못하면 아마 죽을 때 눈을 감지 못할거예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는 필생의 역작을 써볼 겁니다."
그가 정말 필생의 역작을 쓸 수 있을지 없을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토록 확신에 차서 "내가 나를 알지요"라고 말하고, 용기를 낼 수 있는 그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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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책 첫 표지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김윤후 오빠 29세 생신선물
생신 선물이 너무 늦어져서 죄송해요.
아직도 인턴 월급은 안 나왔지만
성의껏 자금을 모아 준비했어요.
 이 책이 오빠에게 작지 않은 즐거움을 주고
오래가는 뜻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년 생신이 올 때까지
즐거운, 행복한 일만 생기길 기원할게요.

                               2009. 8 그녀



녀석. 귀여운 후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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