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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군의 사생활

김윤후 2009. 12. 1.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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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가 형의 전화를 받고 모텔을 빠져나와 집으로 달려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이미 상황은 휴전기로 돌입하고 있었다. 그의 형은 자기 방에서 사태를 방관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고 그의 작은누나는 H와 그의 형과 그의 누나 모두를 잉태했던 그들의 엄마의 머리채를 한움큼 쥐어잡고 씩씩 대며 무슨 말인가를 해대고 있었다. H의 엄마는 입 근처가 심하게 긁힌 듯 베어나온 피가 번져 입이 귀까지 찢어져 마스크를 하고 다닌 다는 홍콩처녀귀신이 마스크를 벗은 것 처럼 괴기스럽게 머리채를 붙잡힌 채 정신없이 떨고있었다. 그녀의 동공은 이미 반쯤 풀려있었고 응수하지 못하고 이내 허공에서 가로저어지는 팔을 어깨에 매단 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H가 전화로 작은누나와 엄마가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형의 무능력함을 시원하게 꼬집지 못하고 전화를 끊은 것에 대해 화가나 집으로 오는 길 내내 마른 바닥에 헛구역질을 해댔다. 급한 성질에 생각 되로 일이 되지 않거나 과잉된 감정을 다 분출하지 못했을 때 하는 H의 버릇같은 행동이었다. 서른을 훌쩍 넘긴 사내놈이 되가지고 어머니와 여동생이 싸우고 있을 꼴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한심하다 못해 해괴한 일처럼 느껴졌고 동시에 '형이 늘 하는 일이 그럼 그렇지' 하고 평소의 형 모습을 대할 때 처럼 쉽게 체념해버렸다. 두 모녀가 머리채를 잡고 뒤흔드는 곳은 그의 집 거실이었으며 서울 한복판이었고 2009년 현재였다. 그날 H의 집 지붕에는 패륜이라는 단어가 비스듬이 걸려 나부꼈고 콩가루 집안이라는 비아냥이 바람처럼 윙윙댔다. 그의 작은누나는 술에 취해있었다. 얼굴은 빨간 페인트를 쳐바른듯 있는대로 불콰해져 있었고 다리는 힘이 풀려 제대로 서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입에서는 계속해서 외계어가 튀어나왔고 주인없는 텔레비전에서는 9시 뉴스 앵커가 피서기를 맞아 전국 방방곡곡으로 떠나는 여행인파로 고속도로에 징그러운 지네의 몸통처럼 이어진 교통체증을 가쁘게 중계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작은 누나의 빚은 모두 천칠백만원이었다. 카드빚, 대출빚 등을 합쳐서 모두 천칠백만원이라고 말하는 누나의 말을 H는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살면서 H의 통장에 가장 많았던 돈은 채 오백만원이 안되었고 그 비슷한 금액을 인출해본 적은 더구나 있을리 만무했다. 가끔 은행에 가서 목돈마련 저축 어쩌고저쩌고 하는 플래카드에 적힌 목표금액이나 신용카드를 만들기 위해 작성하는 서류에 적힌 이체가능 금액에서 비슷한 숫자를 본 것도 같긴 했지만 천칠백만원이라는 숫자는 불알달고 태어나서 그가 처음 접하는 아라비아 숫자였다. H에게 그 돈은 십억과도 같았고 백억과도 같았으며 조나 경, 불가사의같은 책에서나 존재하는 수와도 같았다. 헤아릴 수 없고 본 적도 없으며 시간 당 사천오백원짜리 아르바이트를 24시간 잠도 안자고 몇 십년을 해도 만질 수 없다는 사실에서 H에게 그 돈은 몇십 몇백억처럼 똑같이 아득하고 멀고 공허한 돈이었다. 지금이 마지막이니 하나도 남기지 말고 일원단위까지 가지고 있는 빚의 모두를 자신에게 말하라고 그의 누나를 몰아세웠을 때 누나는 정말 미안하다며 인터넷 상의 쪽지로 H에게 금액을 털어놓았다. 카드는 모두 두개였고 사금융 대출은 3건, 은행권대출이 2건해서 모두 7건의 빚이 컴퓨터 화면에 번쩍이듯 떠있었다. H는 그 숫자들의 나열을 유심히 살펴보았고 단순히 숫자로서라도 이해하려고 머리를 쥐어짰지만 도저히 막막해진 그의 가슴과 터질 듯한 그의 머리는 눈 앞의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아. 이런 미친년' 
 H의 입 속에서 갑작스레 확실한 누군가를 향한 욕들이 자라났고 순식간에 입 안을 가득 메웠으며 터져나오는 욕무더기를 참지 못하고 결국 그는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도대체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고 몰상식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이 엄청난 돈을 어디다 썼으며 돈을 쓰면서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예상도 못했단 말인가. 봇물 터지듯 탄식어린 의문들이 쏟아졌고 결국 H는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심한 분노로 부서질 듯 아프게 이를 앙다물며 말을 잃어갔다. 한참동안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H는 그의 머릿속이 욕조의 비누거품처럼 부글부글 끌어오르는 것을 느꼈고 대체 여자란 족속들이 하는 모양새란 왜 다 요모양요꼴들인지 알 수없는 답답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늦은 밤, 학교 도서관에 앉아 모니터만 뚫어지게 바라보다가는 모니터에 구멍이 뚫리는 일 말고는 구체적인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을 듯하여 H는 가출하듯 가방을 챙겼고 부부싸움하듯 부서져라 문을 닫고 집으로 와버렸다. 그랬던게 바로 한 달 전의 일이었다.
 H는 등 뒤로 닫히는 현관문의 끼익거리는 굉음을 들으며 전의에 불타 전장을 목도한 군사처럼 주먹을 움켜쥐고 거실로 돌진했다. 그의 눈에서는 천벌을 내려 불의를 응징하는 듯한 매서운 광채가 부시게 쏟아져나왔고 결국 H는 상황의 진실 여부를 떠나 잠시나마 혈육의 정으로 그간의 일을 화목하게 해결하려했던 자신을 비난하듯 팽개쳐버리고 그의 작은누나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씨발, 뭐 이런 병신 같은 년이.'
H는 뒤로 나자빠지려다 텔레비전을 올려둔 목조가구에 부딪혀 엉거주춤 서있는 그녀의 오른 쪽 뺨을 재빠르게 다가가 위에서 아래로 사정없이 내려쳤다. 그러자 곧
성황리에 끝난 뮤지컬 커튼콜에서와 같은 경쾌한 박수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퍼졌고 그런 멋진 공연에서 늘 그런 것처럼 2009년의 서울 한복판 어느 빌라 2층에서는 한동안 쉬지않고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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