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남편광주아빠
픽업배송물 본문
찾아가지 않는 픽업배송물이 하나 있다. 주문일자는 지금으로부터 2년전인 2008년 여름의 어느날. 나는 잠시 그 때 내가 무슨일을 하고 있었나 생각해보다 손님을 맞는다. 픽업배송물을 담은 탑차가 올 때마다 나는 서랍장에서 그 물건을 꺼내 요리조리 살펴보곤 했다. 2년전 여름 어느날 누군가에게 배송되었어야 했을 주인없는 배송물. 내용물을 궁금해하며 아르바이트 생들끼리 배송물의 주인과 찾아가지 않는 사연에 대해 얘기해보는 일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그 배송물은 내 기억에서 조금씩 잊혀졌고 나는 평소처럼 라떼킴이 되어 커피머신에 커피빈을 넣으며 바리스타를 흉내내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시간에 밀려 사라진 기억들. 내 일상에서 그 물건이 흔적을 지워갈 때쯤 내가 주문했던 책이 수요일에 도착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책을 주문하고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의 설레임이나 도착 후 책을 받아 포장을 뜯기 전의 즐거운 초초함은 언제나 새롭고 . 1월은 광석이형의 기일이 있는 달이었다. 나는 사진하는 임종진이 오래 묻어두었다가 새롭게 엮은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를 주문해 간만에 형을 만나고 싶은 생각에 들떠 있었다. 책을 받아들고 즐거운 마음에 포장을 뜯으려다 나는 갑자기 주인없는 그 배송물이 생각났다. 문득, 갑자기, 불현듯. 나는 내 책을 내려놓고 찾아가지 않는 그 문제의 배송물을 집어들었다. 왜 전화해볼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배송정보란에 적힌 그녀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발신음은 길었다. 누군가가 방안에 앉아 울리는 전화기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며 저편에서 '여보세요?' 대답하길 기다렸지만 몇 번을 걸어도 발신음은 이편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미칠 것 같은 갈증을 느꼈다. 왜 받지 않는 것일까? 발신음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 번호의 주인이 있다는 얘기일 테고, 발신음이 길게 이어진다는 것은 일부러 받지 않는것은 아니라는 얘기인데. 왜 그녀(배송물 배송정보란의 주문자 이름이 누가봐도 여자였기에)는 전화도 받지 않고 2년 동안 물건도 찾아가지 않는 것일까? 궁금증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쯤 내 행동을 지켜보던 점장이 말했다.
"윤후씨, 그거 제가 여러번 전화해봤는데 안받더라구요. 윤후씨가 해도 안받을걸요?"
나는 물었다.
"우리 점포에 자주 오던 분이셨어요?"
"아뇨, 전 여기 점장맡은지 6개월 밖에 안되서. 그거 2008년도꺼 아니에요? 그때 전 없었어서 잘 모르겠어요."
점장이 총총걸음으로 화장실로 가버리고, 나는 혼자 다시 고민했다. 픽업배송은 일상이 바빠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집 밖에서 보내는 현대인들이 출퇴근 시간에 자주 들르는 편의점으로 택배를 받는 시스템이었기에, 나는 그녀가 이 점포에 자주 왔었으며 점포 근처에 거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직장이 있는 여성이었기에 대략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일테고, 왕십리에서 출근을 한다면 회기쪽은 아닐 것이고 그러면 종로 아니면 명동이·····. 혼자만의 가상소설을 쓰다가 나는 퇴근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생각해 퇴근하기 전에 한번 더 전화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후번 근무자가 오고 인수인계를 하고나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전화를 또 안받으면 어쩌지? 전화를 받으면 뭐라 말해야하나?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배송물을 무릎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 다시 전화를 걸었다. 또다시 긴 발신음. 받지 않는다. 다시한번. 또다시 길고도 먼 발신음. 받지 않는다. 또다시...
받았다! 긴 발신음이 멈추고 딸깍. 저편에서 응답이 있다. 짧은 숨소리, 왜인지 멀게 느껴지는 거친 숨소리. 누굴까? 저편에서 답이 없다. 내가 먼저 말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혹시 OOO씨 핸드폰 아닌가요?"
그리고 들려오는 탁한 저음.
"맞는데요. 누구세요?"
할머니의 음성. 전등은 깜박거리고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골방에 요를 깔고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어느 60대 노인의 음성같은. 가래로 인해 한번에 내뱉어지지 못하고 뚝뚝 끊기는 저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박또박 발음하려고 노력하는 듯한 저편의 할머니. 나는 잠시 멍해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아.. 저기. 안녕하세요. 저는 OOO씨가 자주가는 편의점 아. 아니. 그러니까 가게 알바 아. 종업원인데요. 2년전에 픽업 그러니까 맡긴 물건이 있었는데 안 찾아가셔서······.
나는 어영부영, 더듬더듬 말을 이었지만 나도 내가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저편의 할머니가 편의점이나, 알바나, 픽업이라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지. 그러다가 꼭 이거 찾아줘야 하는 건,.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지, 괜한 짓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 때 작은 탄식과 함께 답이 돌아왔다.
'아······. OOO이가 내 딸이긴 한데. 뭐가 뭐라고요?'
'아 네. 왕십리역 쪽에 있는 가겐데요. OOO씨가 맡겨놓은 물건이 있어서요. 찾아가시라고 전화드렸어요.'
'거기가 어디라구요?'
'왕십리역이요. 서울. 광진구. 모르세요? 어디신데요?'
'여기는 서울아니고 강원도에요. 그리고 내 딸은······'
조금 안정되어 또렷해진 목소리로 할머니는 자신의 딸이 재작년 여름에 죽었다고 말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묻지 못했다. 다만 죽음을 말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쉽게 젖어드는 것을 보니 편안하고 순탄한 죽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찾으러 갈 사람도 없고, 찾으러 갈 수도 없다고 말하면서 할머니는 그 책을 내게 주겠다고 했다. 괜한 말이 길어졌다는 대화를 끝으로 할머니는 전화를 끊었다. 할머니는 전화기를 내려놓으셨지만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묘한 떨림으로 나는 일어날 수도 계속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갑자기 시간이 멈춰버린듯, 배송물의 주인인 그녀가 내 안으로 들어와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나는 희미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2년 전에 죽어버린 그녀.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주문했을 그 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점장님의 인기척에 놀라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귓가에서 할머니의 물기어린 목소리가 윙윙댔다. 나는 허겁지겁 가방을 들쳐메고 점포를 빠져나왔다.
멍해져있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지하철 안이었다. 오른손에는 그녀의 책이 들려있었다. 이 책을 찾으러 집을 나와 버스정류장을 지나치고 자주가던 분식집을 휘 돌아 멀리서 점포가 보이고 그 앞 횡단보도에서 초조하게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도로를 가로지르며 걸어오는 그녀를 덮치는 1톤트럭의 굉음도 들려왔다. 이 책은 그녀에게 무엇이었을까.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지, 진짜 나이는 몇살이며 결혼은 했는지, 하지 않았다면 남자친구는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었는지. 그 전부를 나는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는 그녀의 죽음과 잇닿아 있는 책이 내 손에 들려있었다. 나는 포장을 뜯어보고 싶은 충동으로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무슨책일까? 대체, 무슨 책이 들어있을까?
결국 나는 그 픽업배송물을 뜯어보지 못했다. 나는 다음날 그 물건을 점포 서랍에 얌전히 넣어놓았다. 그날 오후 창기가 주문한 (사실, 지영이가 신청한) 픽업배송물이 들어왔고 나는 도착확인서에 내 이름을 써 넣었다. 박스포장을 뜯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오르는 듯 얼굴이 벌게지고 눈가가 흐려졌다. 포장을 뜯어 책을 확인했다. [저주받은 하체, 저주를 풀어라] 책 표지에는 탄력적인 피부와 몸매를 자랑하는 여성 트레이너의 전신이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 박스에 책을 넣었다. 손님도 별로 없는 오후였다.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냉소적인 겨울바람이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달려들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겨울은 아직이었다. 그 서랍, 그 위치에 아직 그녀의 픽업배송물은 놓여있다.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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