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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본문

틈/사소한 것들

신경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김윤후 2010. 6. 28. 11:07









 그녀석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다.

 뚱뚱한 녀석. 키는 나보다 조금 작고 얼굴은 한가위 보름달처럼 둥근 녀석. 고기반찬을 좋아하고 축구로 다져진 종아리 근육이 멋진 녀석. 그리고 또. 많은 사랑에 아파하고 친구들에게, 특히 내게는 더욱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기 싫어 사라지기 전 나를 멀리하려했던 녀석. 그녀석은 몇 년 전 이제는 그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날에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Alcoholers. 그래 알콜러스 얘기를 빠트리면 안되겠지. 최인호의 성장소설에 나오는 [머저리 클럽]의 녀석들처럼 우리 알콜러스들도 때만 되면 서로를 찾아 재미난 일거리들을 만들어내는 놈들이었다. 개그맨보다 더 웃기던 명호, 잘생긴 외모에 훤칠한 키와 뭐든 모아두는 경훈이, 합기도 유단자 합맨 성수, 술 잘 마시고 앳된 외모로 건대 헌팅계를 평정한 우진이, 그리고 그녀석과 나. 우리는 늘 붙어다녔다.

 함께 수능을 치뤄내고 대학의 젊을을 통과하며 그렇게 남들처럼 서로의 자리를 잊어가던 즈음이었나. 바람에 옷깃이 날리 듯, 이별의 뒤돌아서는 차가운 발걸음처럼 녀석은 사라졌다. 누군가는 돈의 문제라고 했고 누군가는 가정사의 복잡함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믿지 않았다. 여태껏 연락조차 없고 전화한통 받지 않는 연유를 나는 직접 보고 듣지 않고서는 믿지 않으려 했다. 허풍도 있었고 허세도 있었지만 그 정도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도라고 생각했고 녀석의 그런 자기과시는 문제가 있는 가정 - 내 가정 처럼 - 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이 학습되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사계절을 오가는 바람 속에 녀석에 대한 무의미한 억측들은 묻어날렸지만 나는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작년 봄. 잔인한 4월의 느즈막에 나는 녀석을 뜻밖의 장소에서 만났다. 멀리서 녀석 특유의 걸음걸이가 보일 때 나는 설마 설마 하며 자꾸 눈을 비볐다. 예비군 훈련이 있던 봄날 연병장에서였다. 똥국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집결장소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뒤뚱거리는 녀석의 상체가 내 시야에서 또렸해졌을 때 나는 자리에서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두려웠던 것일까. 가슴 안쪽에서부터 녀석의 이름이 피어올랐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억눌려 소리로 뱉어지지 못하고 있던 그 때, 녀석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당황해 하며 화끈거리는 얼굴을 부여잡고 뒤돌아섰다. 나를 보았을까. 죄를 지은 것도 없고 녀석과 의절한 채 헤어진 것도 아닌 데 나는 왜 녀석을 힘차게 부르지 못했을까. 무엇이 그 때의 나와 녀석의 사이를 막아서고 있었을까. 가뿐 숨을 고르며 나는 집결지로 조용히 돌아왔고 결국 멋적게 녀석의 어깨를 치며 뒤늦은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야. 충일아. 너 이새끼.

 나처럼 녀석도 당황한 듯 했다. 왜 이렇게 연락이 없었으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는 오후 훈련이 끝나고 묻기로 하고 소대가 달랐던 녀석과 나는 다시 멀어져 때때로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가끔 시선이 겹치기도 했고. 전과 달리 괜한 센치함에 소지품을 보관하라는 동대장의 말에 핸드폰을 반납해버린 것을 나는 오후 훈련 내내 후회했다. 어서 이 사실을 우리 알콜러스들에게 알려야 할텐데. 시간은 더디게만 갔다.

 훈련이 끝나고 녀석을 만나 들었던 녀석의 근황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충격을 나누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녀석을 바꾸어 주었고 한 녀석은 절대 녀석을 그냥 보내지 말라며 자신이 일을 끝마칠 때까지 도망 못 가게 잡아놓고 있으라고 내게 협박아닌 협박을 해왔다. 결국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녀석과 나눈 대화가 그날의 마지막 대화였다. 우리집에서 가까운 곳에 어머님이 살고 계신다는 말을 하고 잠시 다녀온다며 택시에서 내리지 않던 녀석을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 다시 녀석은 사라졌다. 전화벨을 아직도 꺼져있고.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얼마일까. 내가 처음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고 동네 친구가 되어 그 좁은 골목에서 매일을 흙먼지 속에서 뒹굴던게 초등학교 3학년 겨울 부터니까 햇수로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평생 갈 꺼라고 장담했던 친구. 그래도 한 번 쯤은 연락을 하겠지? 다른 녀석들과 술한잔 할 때면 어김없이 술자리의 끝에 이름이 올라오던 친구. 우리 알콜러스들은 끊임없이 녀석을 향해 벨소리를 보내고 있다.

 어느 덧, 나이는 계란 한판이요 체력은 저질이고 불룩한 술배에 억울한 표정들만 늘어가는 요즘, 나는 녀석을 알았던 것이 한 여름밤의 꿈처럼 아득하게 잡히지 않는 것 같다. 어딘가에서, 그래도 우리 알콜러스들이 알고있는 전화번호는 바꾸지 않고 꺼져있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고심하고 있을 녀석. 너를 찾는 전화벨은 다된 배터리 속으로 묻혀버렸지만 내 귓속엔 끊임없이 너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

 소주 한 잔으로 주린 위장과 마른 혓바닥을 적셔냈던 그 때 우리들. 가열차게 싸우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만나서 독설하고 또 다시 인정하며 비틀거렸던 그 때의 그 밤들이 다시 찾아와 준다면 어떨까. 가끔씩 너를 향한 내 무심함이 일상 속에서 흩날릴 때 어쩌면 나는 그것을 그냥 흘려보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 속에 잊혀짐을 당연히 생각하면서 말이다.

 나는 다시 전화기를 들어본다. 알콜러스 폴더에 적힌 니 이름에서 발신버튼을 누른다. 고객님의 사정으로 연결할 수 없다는 안내원의 목소리. 그 목소리 너머에서 숨죽이고 있을 너를 생각하며 나는 다시 너를 찾는 벨소리를 듣는다. 신경숙의 장편소설을 읽으며 나는 오래도록 녀석을 생각했다. 아주 오래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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