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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생각

[이옥남]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

김윤후 2018. 9. 13. 17:34

 

사람도 그와 같았으면

2003년 6월 24일 흐림

 

요즘에는 새소리가 많이 들린다.

뻐꾹새 우는 소리는 늘 들어봐도 마음이 슬프다.

저녁에 솟종새 우는 소리가 들리면 처량한 생각에

잠을 설치고 아침 다섯 시 되면 꾀꼬리 우는 소리에 곤하게

자든 잠도 활짝 깬다. 곤히 자다가도 정신이 나는 것 같다.

앞마당가에 백합꽃이 봉오리가 생기더니 한 이십 일 정도

되니까 6월 20일부터 피기 시작하드니 오늘 사흘째 되니

다 활짝 피었다. 문열고 밖에 나가면 백합 냄새가 향이

너무 확 난다. 참 귀엽고 만져보고 싶다.

하얀 백합이 보기에도 깨끗하고 즐거워서 사람도

그와 같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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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강원도 양양군 서면 갈천리에서 태어나신 저자는 열일곱에 지금 살고 있는 송천마을로 시집와 아들 둘, 딸 셋을 두었다. 글씨 좀 이쁘게 써 볼까 하고 날마다 일하고 집에 돌아와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30년이 넘었다. 글쓴이가 만난 자연과 일, 삶을 기록한 글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 책 소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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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는 시골에서 살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할머니가 아버지를 낳은 곳이었다. 어렸을 때 할머니와의 기억은 별로 없다.

국민학교 3학년 말에 오로지 자식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우리 가족은 아버지 의지대로 서울로 올라왔다.

방학이 되어 시골에 내려가면 할머니는 언제나 정지에서 고무신 신은 그대로 뛰어 나와 내강아지를 연발하시며

나를 맞아주셨다. 할머니의 냄새를 어렴풋이 기억한다. 흙냄새와 비슷했던 할머니 냄새.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시고 3년만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시던 날 아침 할머니는 몸을 세웠다가 곧바로 쓰러지는 아들을 보고

너무 놀라 말이 나오지 않으셨다고 한다. 한참을 먹먹하고 윙윙대는 정신으로 아버지를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자

그제야 목소리가 나오는지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세상 가장 큰 목소리로 도와달라고 소리치셨단다.

우리 아들 죽소. 살려주시오. 여보시오. 도와주시오.

다행히 옆집 우사에서 여물주시던 큰아버지께서

- 실제 큰아버지는 아니나 우리 아버지와 막역한 어른이셔서 내가 그렇게 불렀다.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와 신고를 해주셨다. 구급차가 올 때까지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 당시의 충격이 컸었는지 혼자서도 고향에서 무리없이 사시던 할머니는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지셨다. 혼자 계시는게 힘들어지셔서 우리 가족은 할머니를 서울로 모셨다.

- 할머니가 서울로 오시던 날이 생각난다. 차가 없던 우리가족은 할머니를 고속버스에만 태워달라고 큰아버지에게

부탁하고 시간에 맞춰 내가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나가 있었다. 도착한 할머니의 첫 말. 아이고 내강아지.

할머니를 모시고 지하철을 타려고 이동하는데 할머니는 에스컬레이터 앞에 서서 발을 떼지 못하셨다.

자꾸자꾸 올라가는 계단같은 것에 어떻게 발을 올리는지 무서우셨던 할머니를 나는 업었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를 다 올라온 뒤에는 지하철을 타지 않고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멀미를 하실 수도 있어 택시 창문을 활짝열고 할머니께 서울 풍경 이곳 저곳을 설명해드렸다.

 

서울로 모신 것은 어떻게 보면 할머니의 남은 생을 더욱 단축시켰는지 모르겠다.

아들은 반쪽을 못쓰는 어른아이가 되어 병원에 누워있고 손자들은 때되면 나갔다가 들어오며

며느리에게 이것 저것 의지를 해야하는 상황을 할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돌아가시기 전날 일찍 집에 들어갔던 나를 앉혀놓고 할머니는 용돈을 주셨다. 갑자기 돈을 쥐어주시면서

할머니는 내게 엄마 아빠 잘 모시고 살아야 한다 내강아지. 작게 말씀해주셨다. 그날 형, 누나들에게도

용돈을 주시고 엄마에게도 건강하라고 평소에 하지 않으시던 얘기를 길게 하셨다.

다음날 아침에 아버지 간호차 병원에 있던 나는 어머니에게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는 오전에 갑자기 목욕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 부축을 받아

욕실에서 깨끗히 목욕을 하시고는 졸립다고 안방에 들어가셨는데 한참을 지나도 인기척이 없어

어머니께서 들어가보니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결국 나는 할머니 가시는 것도 보지 못한

불효한 손자가 되었다. 병원에서 그 전화를 받을 때 세상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를 보면서 울음이 솟구치는 것을 억지로 참았었다.

 

이옥남 할머니의 책을 읽으며 나는 할머니를 떠올린다.

후회되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왜 나는 할머니의 생각을 단 한번도 물어보지 못했을까.

할머니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내가 지금 할머니에게 이렇게 행동 하는게 어떤 기분이신지 왜 그때는 한번도 묻지 못했을까.

책 속의 여러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할머니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시는구나.

주변의 사물을 보고, 계절의 변화를 겪고, 자연의 섭리를 경험하며 작은 것에도 감정이 뒤섞이는,

나와 똑같이 즐겁고, 슬프고, 또 삶을 이리저리 바라보며 함께 살고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우리할머니도 그러셨겠지.

할머니는 어땠을까. 우리 할머니는.

할머니가 가끔 꿈에 나와 나를 '내강아지'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할머니의 '요즘'에 대해서 친구들고 하는 것처럼 묻고 듣고 또 웃고 싶다.

책 읽는 내내 할머니가 많이 보고싶었다.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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