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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남편광주아빠
성장소설을 좋아했다. 어느날엔가는 황석영작가의 [개밥바라기 별]을 읽고나서 깊게 감동했었다. 박완서작가의 [그남자네집]도 사실 작가의 경험이라고 봐야 했기에 성장소설과 비슷한 류였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검은 구름이 심장을 가리는 것마냥 답답하고 초조했던 신경숙작가의 [외딴방] 역시 그녀의 과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여 마지막 장까지 긴장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상처없이는 떠올릴 수 없는 자신의 과거를 글로써 고백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 역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써야 읽어줄 만한 글이 나온다는 애기를 듣고 내 가난했던 청춘을 옮겨 적어보려 했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늘 웃음을 달고 다녔지만 가슴 한 켠에 시퍼런 칼날을 숨기고 다니던 그 시절의 설명할 수 없는 공허와 고독..
내 안의 욕망이 고개를 드는 순간에 나는 버티기 보다 쉽게 무너져 내렸다. 술자리에서 취기를 이기지 못함에도 계속 술잔에 술을 따랐고, 이른 새벽 봉두난발로 침대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간에 잠을 이기지 못했고, 삶의 곤궁 속에서도 그녀와 방탕한 사랑을 즐겼다. 절제, 인내, 중용의 덕들은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썩은 욕망의 탑이 세워졌다. 나는 쉽게 무너져 내렸다.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반갑게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그 경험이 숨겨야만 하는 경험이고, 그 경험의 치부를 감쌀 포장지가 너무 가볍다 싶으면 경험의 공감대는 거부감을 만들어 낸다. 또 다른 더러운 내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은 내 심장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직접 보는 것처럼 역겹다. 그냥 싫은 것이다. [꽃의 기억]에서 박경진..
많은 갈림길에서 오직 최악의 길만 골라 갈 때가 네게도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원에서 12시까지 공부하고 2시까지 학원 위층 독서실에서 책보다 집에 오면 아버지는 늘 술에 잔뜩 취해 거실에 앉아계셨다. 불콰해진 얼굴로 전화기를 붙잡고 마구 욕을 해댔다. 누구일까. 아무튼 그분도 참 잘못 걸리신 날이다. 엄마는 내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벽쪽으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잠든척 하고 있었다. 가방을 방안 구석에 내려놓고 늦은 저녁을 먹으려 냉장고 문을 열면 채 치워지지 못하고 층층이 널부러져 있는 반찬그릇들이 보였다. 아. 또 엎으셨구나. 매번 엎어져도 상다리 한번 부러지지 않았던 우리집 밥상. 쉽게 부러질 것이었다면 아버지께서 밥상에 화풀이하지 않으셨을까. 아무말도 하지 않았던 그 새벽에 나는 내..
김인숙 작가의 소개글은 이전 '우연' 평의 것으로 갈음한다. 솔직하다. 빠르다. 거침없다. 종이 이곳 저곳에 상처와 결핍이 스며있고 아픔에 시선을 던지지 않는 듯 하면서도 지독히 바라보는 치밀함. 김인숙의 장편소설 '우연'을 읽고 느꼈던 감정선들이다. 두번째다. 이번에는 '봉지'다. 그전에 내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꺼내자면 네모난 모판이 떠오른다. 오리가 넘는 하굣길을 걸어 집에 오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아빠는 일하러 나갔고 분명 누나들은 할머니와 밭에서 김매느라 땀범벅이었을 게다. 형은..... 기억이 없다. 아무튼 나는 질경이를 뽑아 입에 물고 조물조물 씹어 단물을 짜내면서 엄마를 보러 갔다. 마을 시정을 지나 버스정류소가 있는 마을 외곽까지 걸어가면 동네 냇가 건너기..
김인숙 (金仁淑)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1학년 때인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상실의 계절」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함께 걷는 길』『칼날과 사랑』『유리구두』『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와 장편소설『핏줄』『불꽃』『'79-'80 겨울에서 봄 사이』『긴 밤, 짧게 다가온 아침』 『그래서 너를 안는다』『시드니 그 푸른 바다에 서다』『먼길』『그늘, 깊은 곳』 『꽃의 기억』『우연』등이 있다. 1995년 『먼 길』로 제28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2000년 단편 「개교기념일」로 제 45회 현대문학상 수상 내가 신경숙 작가에게서 김인숙 작가에게로 시선이 옮겨 간 이유는 그다지 크지 않다. 신경숙작가의 『깊은 슬픔』을 읽을 즈음, 나는 애기능생활도서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