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틈/詩가 있는 땅 (6)
서울남편광주아빠
한 때, 시인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이 나 말고 또 있을까. 한 곳만 보고 경쟁하던 고등학생 시절, 나는 훗날 문학 소년으로 남고 싶어 늦은 저녁 학교 건물 5층 도서관 구석에서 좋아하던 시들을 필사했다. 스프링 연습장을 사고 예쁜 색연필이나 꾸미기 좋은 펜들을 가지고 다니며 시간이 나면 종종 예쁘게 시를 적었다. 가끔 너무 자주 했다 싶은 축구가 술 취한 다음날의 반찬 처럼 텁텁해질 때, 교정 계단에 앉아 시를 소리내어 읽었다. 나는 내가 시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시를 알고 있다는 말이 무척 건방져 보이지만 당시 시는 다른 아이들과 나를 구별지어주는 하나의 선이었다. 굵고 커서 넘볼 수 없이 견고한. 나는 아무에게도 시를 알고 있다고, 가끔이지만 쓰기도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써놓고 ..
오른손이 한일을 왼손이 모르게 때린다 아빠를 때릴 때 내 손에는 우주의 기가 장전됐다 아구창을 날리던 그 때의 기억을 충분히 발라 허벅지에 엉덩이에 뺨에 가슴팍에 꽂을 때마다 신음했다 아빠는 좋아죽는 투로 아빠를 때린 것처럼 엄마를 때리고 싶었고 엄마를 때리고 싶은 마음으로 누나를 때렸다 잠만자는 형에게도 날리고 싶은 마음은 아무려나 내게로 돌아왔다 때린다 나는 아무리 눈을 부라려도 책밖으로 진리는 걸어나오지 않고 밤은 쉬이 아침을 내주지 않았다 결국 기다린적 없는 서른의 끓는 피가 식어 밥상앞에 묵사발로 올라올 때 나는 다시 내출혈의 아픔으로 뇌출혈의 아버지를 때린다 말라버린 거실의 나무들을 씹어먹으며 나는 도통 일어서질 않는 세월로 잠식된 아빠는 퀘퀘한 냄새로 하나의 별이 되고싶었을까 도망치는 나를 ..
골목의 각질 강윤미 골목은 동굴이다 늘 겨울 같았다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었다 누군가 한 사람만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공용 화장실이 있는 방부터 베린다가 있는 곳까지, 오리온자리의 1등성부터 5등성이 동시에 반짝거렸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표현처럼 구멍가게는 진부했다 속옷을 훔쳐가거나 창문을 엿보는 눈빛 덕분에 골목은 활기를 되찾기도 했다 우리는 한데 모여 취업을 걱정하거나 청춘보다 비싼 방값에 대해 이야기했다 닭다리를 뜯으며 값싼 연애를 혐오했다 청춘이 재산이라고 말하는 주인집 아주머니 말씀 알아들었지만 모르고 싶었다 우리가 나눈 말들은 어디로 가 쌓이는지 궁금해지는 겨울 초입 문을 닫으면 고요보다 더 고요해지는 골목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인기척에 세를 내주다가 얼굴 없는 가족이 되기도 했다..
누군가는 공부를 하고 누군가는 인터넷을 항해하고 누군가는 책을 다 읽어버린 오후 글자판이나 두들거리는 무뢰한 하나가 Don Mclean 의 Vincent를 들으며 생각을 뭉친다 햇살은 저 온 곳으로 돌아가버리고 학생들은 공이나 튀기는 시간들이 그림자를 만들며 내게로 걸어올 때 나는 무엇이 되려했다 나는 무엇이 되어 무엇을 하고 싶었다 나는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
혼자 먹는 밥 - 강윤후 거실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햇살이 어느결에 뒤걸음질쳐 베란다 바깥으로 물러난다 늦은 봄 허탕치듯 만발한 라일락은 이윽고 어둠을 불러모아 스스로 한 그루의 어둠이 되고 나는 태언하게 쌀을 씽어 안친다 손수 끼니를 짓는 일도 습관 들이기 나름이어서 그런 대로 견딜 만하지만 여전히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다 식구들이 둘러앉아야 비로소 풍성해지는 저녁식탁 그러나 아무리 잘 차린들 내 저녁식탁은 스산하기만 하여 여물을 씹듯 밥알을 우물거리며 게으르게 시간을 으깬다 함께 찌개를 뜨던 다른 숟가락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빈 교실처럼 조용한 나날이 식탁위를 흐르는데 가끔 먼 기억 어디선가 지금 행복하냐구 물어서 생각해 보면 내게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아 맥없이 숟가락을 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