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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남편광주아빠
매일 울고 매번 웃는 시간들 속에서 감정이 점점 소진되고 있다. 오랜만에 상경한 대학 동기녀석은 그의 팔짱을 낀 폴랑거리는 여자친구를 달고 나타났다. 실실대지는 않았지만 그간의 연애가 녀석에게 좋은 인상으로 남았던지 전체적으로 편안한 모습이었다. 날은 맑아 하늘에 구름한점 없었으며, 시원한 바람 속에 검은 하늘을 올려다 봤을 때 유난히 별이 잘 보이는 저녁이었다. 한참동안 자리에 서서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내곁으로 그녀석이 다가왔다. 녀석의 여자친구와. "뭐해?" "그냥." 술을 마셨다. 간만에 들른 휘모리에서 늘 마셨던 사과소주와 늘 먹었던 모듬꼬치를 시켜놓고 녀석과 녀석의 여자친구와 마주앉아 그간 녀석의 연애담과 앞으로의 계획과 서울로 올라온 오늘 하루동안의 이러저러한 일들을 들으며..
모든 사물은 상처다. 칠이 많이 벗겨진 개다리 소반, 이광기가 아들의 죽음을 기억하며 울고 있는 저 텔레비전, 회사를 퇴사하면서 구입한 엠피쓰리, 드럽게 새로 사고싶은 핸드폰, 상경하면서부터 우리 집 벽에서 재깍거리는 시계. 모든 게 전부 상처다. 아프고 쓰리고 눈물나고 아리고 모질다. 몇 해 살지 않았지만 내 인생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졌을 그 모든 사물이여. 그 때의 내 시간을 채워주었던 모든 이들이여. 사랑이여. 함께 했던 모든 사물들에 내려 앉아 있을 추억들이 모두 상처다. 나는 라면 냄비를 보면 제대 후 복학생으로 살았던 2005년 겨울이 생각난다. 내겐 같이 교정을 거닐 동기가 없었고 함께 추위를 이겨낼 여우목도리가 없었고 늦은 밤 밥상에 밥공기 같이 올릴 친구가 없었다. 북적거리는 24시간 식당..
잠이 오지 않아 며칠 전 사두었던 도종환 시인의 시집을 펼쳐들었다.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을 읽고 나서 왠지 시집으로는 졸음을 불러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번 째 시를 읽으면서 나는 이미 시를 분석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시 속에서 내게로 던져지는 의미들에 대해 허공에 잡념을 섞어 스케치하고 있었기에 나는 '탁' 소리와 함께 시집을 접어 책상 위로 던져버렸다. 도종환 시인에게 별로 미안하지는 않았다. 습기가 없이 건조한 공기 속에 답답한 감이 없지 않아 나는 창문을 열었다. 11월의 차가운 겨울 바람이 거리를 두고 멀리서 다가와 다시 멀리로 불려가길 반복 하면서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니, 청명한 공기 속에서 다시 희미하게라도 남아있는 잠이 달아나버린다면 다신 꿈 속으로 들어갈 ..
변덕쟁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요랬다조랬다 화를 내다 웃고 마는 그대는 변덕쟁이 웬일일까 궁금해서 이렇게 저렇게 물어봐도 대답 없는 그대는 변덕쟁이 밤하늘에 별을 보고 아름답다하더니 내 곁에 다가와서 저별은 너무 외로워 밤하늘에 달을 보고 아름답다하더니 내 곁에 다가와서 저 달은 너무 쓸쓸해 아- 언제 봐도 요랬다조랬다 아- 가끔씩은 얄밉기도 하지만 그대는 나의 귀여운 변덕쟁이 ( 출처 : 가사집 http://gasazip.com/1065 ) 전에 박상민이 불렀던 노래였는데 귀에 맴돌기만 하고 어떤 가수의 노래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김현식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는데 - 비트가 너무 경쾌하고 방방 떠서 - 그의 2집 사랑했어요 앨범의 마지막 곡이었다 '그녀'로 생각했던 변덕쟁이는 인터넷으로 가사를 뒤지다 결국..
쓸쓸한 오후 김현식 비 오는 날 플래트 홈에서 그대 떠나보내고 비 오는 날 창가에 홀로 앉아 아쉬움 달래 보네 눈처럼 하얀 손가락 맑은 눈동자 고운 그 마음 같네 지금은 텅빈 마음과 슬픈 추억들 고독만 남았네 오 --- 오 --- 쓸쓸한 오후였네 유재하가 1987년 11월 1일에 세상을 떠나고 정확히 3년 뒤 같은 날 김현식도 숨을 거둔다. 아침부터 소곤히 비가 내려 시린 겨울날. 무료하게 책이나 씹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의 아침, 오후, 저녁은 그저 듣거나 보거나 하는 일들이 속을 채운다. 그저 일어나 이불을 개고 샤워를 하고 팬티를 갈아입고 인터넷을 한번 항해하고 집을 나와 버스를 탄다. 학교에 도착해서 후배를 만나고 밥을 먹고 시체처럼 팔, 다리, 허리가 잘려나간 은행나무 무덤앞 동네커피숍에서 핫초코를 주문해 마신다. 돌아와 책을 읽고 잠에 빠지며 일어나 다시 책을 보고 글을 써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의 일상은 무료하고 공허하고 고독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내가 나를 버리고 있다는 생각을 잊으려 노력한다. 오늘도 나는 나를 몇번이나 진창에 처박았나. 무능력한 나를, 지루한 나를, 쓸데없이 생각만 많은 나를. 하지만 처박아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저승사자처럼 걸어오는 나. 나는 결국 버려진 ..
--- 김용택 산문집 [오래된 마을] 中에서 학교 회비를 내지 않았다는 방이 교문 앞 게시판에 붙은 지 3일째다. 오늘은 학교에 가자마자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지난주에 집에 갈 차비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걸어서 집에가지 가야한다. 길을 자갈길 14킬로다. 날은 더웠다. 길을 나서서 내가 걸어야 할 길을 바라보니, 집으로 가는 길이 굽이굽이 하얗게 멀리 아득하다. 저 멀고 먼 길을 나는 나 혼자 걸어가야 한다. 어쩔 수 없다. 걷자. 하얀 자갈길에 불볕이 이글거리고 길은 팍팍하다. 1킬로도 가지 않아서 이마에 땀이 솟고 속옷을 입지 않아서인지 교복이 땀에 젖어 자꾸 몸에 달라붙는다. 집에 가봐야 돈이 없을 텐데······. 주저앉고 싶고 학교로 되돌아가고 싶다. 미루나무에 둘러싸인 학교가 멀리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