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소설 (20)
서울남편광주아빠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말이 남녀공학이었지 층 별로 남녀를 갈라놓은 남고 와 여고의 분단체제나 다름없는 학교였다. 가까이 있지만 갈 수 없는 금남의 공간을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우리 혈기왕성한 남학생들은 여학생들과 관련된 일이라면 사족을 못쓰고 덤벼들었다. 여학생 층이었던 3층을 가로질러야만 갈 수 있었던 정보산업 실기시간에 우리는 단체로 열을 맞춰 이동했지만 눈은 여학생들의 반을 기웃거리며 그녀들의 삶을 단박에 훑어내고자 필살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여학생들 중 누구의 얼굴이 예쁘며 누구의 가슴이 제일 크고 누구의 다리가 쭉쭉 잘 빠졌는지 야자 쉬는 시간마다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 킬킬댔다. 그러다가 학교 밖, 그러니까 동네 친구라던지 초등학교 동창이라던지, 교회에서 가깝게 ..
모아둔 그의 문장들이 아쉬워 두 번째 쓰는. 그는 정의 내리기 좋아하는 소설가. 역시 뛰어난 관찰력이 필요해. 1. "기회는 선한 음식 같은 거야. 냉장고에 넣어두면 맛이 떨어져. 젊은이에게 제일 나쁜 건 아예 판단을 내리지 않는 거야. 차라리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게 더 나아. 잘못된 판단을 내릴 까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 이게 제일 나빠. 이렇게 귀신만 득실거리는 집에 웅크리고 있어봐야 뭐 하겠나? 아마 인숙이가 가고 나서 지금껏 제대로 먹지도 않고 뭐 하나 번득하게 한 일도 없을 거야. 안그래?" 2. 군대에서 제대하고 사회로 돌아왔을 때, 가장 피곤했던 것은 선택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군대는 식단이 하나였다. 식판을 들고 줄을 서 있으면 차례대로 밥과 반찬을 준다. 하루의 ..
불안한 청춘 영장이 나왔을 때 나는 숙취로 멍해진 두개골을 부여잡고 화장실 변기 앞에서 토악질을 해대고 있었다. 부엌에서는 이제는 더이상 찰 혀도 없다며 한 숨만 푹푹 쉬시고 계신 어머니가 김치콩나물국을 끓이고 계셨던 것 같다. 채 20평도 안되던 집에서는 당연히 비밀이 없었다. 어머니가 늘 거실에서 주무시기에 나는 끊긴 필름을 술집에 버려두고 새벽녘 요란스럽게 문을 열었고 다음날 눈을 떠보면 늘 김치콩나물국이 밥상위에 올라왔다. 나는 먹은 것이라고는 술과 물밖에 없었음에도 다음날 꼭 건더기 비슷한 것들을 변기로 쏟아내었다. 변기물 위에서 부유하는 기생충 비슷한 것들을 보며 나는 하루를 시작했고 비밀없는 집에서 한 번도 술마신 사실을 들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는 두 번의 연이은 학사경고를 비밀로 해오..
알아. 내가 다 알아. 수학공식처럼 욀 수 있는 것들을 알고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그다지 많은 앎의 리스트를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이다. 우진이가 여자를 좋아하고(사실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는 거의 없지만) 명호는 자기 집에서 멀리 있는 사람과는 잘 사귀려 하지 않으며, 경훈이는 속을 알 수 없는 놈이고 성수는 정에 파묻힐 정도로 오지랖이 넓다는 정도? 경험과 습득. 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대체 어떤 근거로 그리 쉽게 상대방의 개인성을 판단해 버리는 것일까. 내가 너를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 곰곰히 고민해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설명하기 힘든 일이며 알고 보면 사실 하나도 모를 수 있다는 관계의 부정이며 결국 결코 너를 안다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밖에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가족. 지극히..
성장소설을 좋아했다. 어느날엔가는 황석영작가의 [개밥바라기 별]을 읽고나서 깊게 감동했었다. 박완서작가의 [그남자네집]도 사실 작가의 경험이라고 봐야 했기에 성장소설과 비슷한 류였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검은 구름이 심장을 가리는 것마냥 답답하고 초조했던 신경숙작가의 [외딴방] 역시 그녀의 과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여 마지막 장까지 긴장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상처없이는 떠올릴 수 없는 자신의 과거를 글로써 고백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 역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써야 읽어줄 만한 글이 나온다는 애기를 듣고 내 가난했던 청춘을 옮겨 적어보려 했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늘 웃음을 달고 다녔지만 가슴 한 켠에 시퍼런 칼날을 숨기고 다니던 그 시절의 설명할 수 없는 공허와 고독..
할머니는 꽃을 좋아했다. 사랑했다. 지금이야 아무도 살지 않기에 고향집 마당에는 억센 잡초들만 넘쳐나지만 잡초들을 유난히 싫어했던 당신께서 살아계셧을 적엔 마당은 잡초는 커녕 돌멩이하나 없이 깨끗했다. 네모난 마당 네 변에는 꽃을 안은 화분들이 가득했다. 철이 바뀔 때마다 피는 꽃들도 바뀌어 방안에 누워 문을 열면 겨울을 제외하곤 일년 내내 꽃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이름모를 선인장에도 할머니는 꽃을 피워냈고, 여닫을 때마다 삐그덕 거렸던 마당 앞 철문 옆에는 맨드라미가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봉숭아, 채송화가 집으로 들어오는 길 양옆으로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고 텃밭 한 귀퉁이에서는 5월이면 박속처럼 하얀 꽃이 앵두나무 가지끝에 환하게 폈다. 모든 꽃들은 할머니의 손으로 피었다. 할머니는 때가 되면 가지를..
낙엽이 흔들리는 것에 시선을 두다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낙엽을 쓰고 싶었고 바람을 적고 싶었고 너른 평야와 산과 들, 광대무변한 바다를 옮기고 싶었던 내 글세계에서 나는 갓 태어나 옹알이도 어수룩한 핏덩이였다. 그저 하루를 적어 배설했고 그 내용과 구성의 조악함에 나는 매일을 좌절했다. 내가 본 것들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지, 아니 꼭 말 되어져야 하는데 왜 내 입은 묵언수행 부처처럼 열리지 않는 것인지. 머리가 빠지고 한숨이 깊어지고 발걸음은 무거워만 지는데, 내 머릿속 자판위에 먼지는 쌓여가는데 하릴없이 나는 그저 아득했고 내 풍경은 그저 무심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 동창 두놈과 마주앉은 바람불어 코끝이 찡한 겨울 어느날, 우리는 문을 ..
내가 안개를 본적이 있던가. 서울엔 안개가 없다. 안개는 서울 길바닥에 산재한 꽃집에만 안개꽃으로 존재한다. 내 기억속의 안개는 고향의 안개다. 이른 아침, 아궁이에 장작이 불을 뿜고 솥에서 김이 오를때 나는 고소하고 기름진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깼다. 그리고 부시시한 눈을 비비며 문을 열면 마당엔 온통 안개가 내려있었다. 어디선가 닭울음소리 들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할머니는 밥그릇에 개밥담아 내려놓고 계셨다. 백화가 밥그릇 할짝대는 소리가 꿈처럼 들려오고 아버진 아침부터 온대간대 없었다. 내게 안개는 포근한 솜이불 같았다. 안개 뒤편엔 꼭 아버지가 털털거리는 경운기를 몰고 집으로 오고있을 것만 같았고 우리집 백화 - 녀석의 털빛이 하얀 꽃을 닮았다 하여 할머니께서 지으셨다. 할머닌 4년전에 돌아가셨다..
현실은 늘 질척거린다. 진창 속에 발을 담그고 가뿐 숨을 쉬는 사람들은 오늘을 견뎌내기가 힘겹다. 누군가는 태어나고 또 누군가는 죽어나가는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바람은 불고 비는 내리고 해는 뻘겋게 아가리를 벌리고 떠있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그 발버둥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안쓰럽다. 말 되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말들이 해무海霧되어 그림자를 잠식하고 삶은 그 속에서 연명해 나간다. 나는 현실을 현실로서 받아들이고 되어질 수 없는 것들을 말로써 잡아두려는 어중이다. 그러나 김훈의 글 속에서, 말들은 세계를 해체하고 날아가는 새들을 그저 풍경으로 놔두는 말들이었다. 하나마나 한 말들을 하면서 하나마나 한 삶을 노래하는 김훈의 언어들은 늘 나에게 무서운 집중력을 요구했다. 그의 문장들은 현실 속에 뿌..
바이올렛. 제비꽃. 4 ~ %월에 자주색의 꽃이 잎 사이에서 나온 꽃줄기 끝에 한 개씩 옆을 향하여 피고 열매는 삭과이다. 어린잎은 식용한다. 한국, 일본, 중국, 시베리아 동부 등지에 분포한다. 네이버에 바이올렛을 쳐보니 위와 같은 설명이 나왔지만 무슨 말인지 잡을 수 없이 희미했다. 그저 보라색정도로만 알고 있던 나였다. 보라색.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것 같다. 난 보라색을 그다지 호감있어하지 않는다. 선홍보다 더 피의 본질을 담고 있는 빛깔이어서도 하고 동시에 짙은 블루의 심연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색이었다.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의 색이 보라색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너의 사랑 저편에 만발한 꽃의 색이 아닐까. 확실하게 잡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