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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깊은 슬픔 본문

틈/누군가의 한 소절

신경숙 깊은 슬픔

김윤후 2009. 8. 21. 14:26

신경숙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5년 [문예중앙] 신인상에 중편 [겨울 우화]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뒤, 내면, 욕망, 일상, 여성 등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일상적이고 사소해 보이는 세계에 대한 탐구, 자신의 존재를 쉬이 드러내지 못하는 미세한 존재들에 대한 애정, 그들의 흔들리는 내면에 대한 섬세한 성찰 등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소설집 [겨울 우화] [풍금이 있던 자리] [감자 먹는 사람들] [딸기방] [종소리], 장편 [깊은 슬픔] [외딴 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바이올렛] [리진](전2권)과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 [자거라, 내 슬픔아] 등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만해문학상, 이상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신작 장편 [엄마를 부탁해]는 특유의 탁월한 감성과 문체로 다시 한번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작가의 저력을 확인시켜준다.


신경숙의 글은 [외딴방] [엄마를 부탁해] [리진] 이후 [깊은 슬픔] 네번째다. 사실 최근에 나와 지금까지 신작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엄마를 부탁해]를 처음 본 후 나는 신경숙의 글을 거꾸로 읽고 있다. 풍문으로 툭툭 끊어질 듯 써내려간 문체 속에 내면의 깊이를 관조적인 시각에서 펼쳐내고 있는 여성작가(대체무슨 말인지)라는 이야기를 들어왔기에 적잖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긴 했다. [엄마를 부탁해]를 4시간만에 읽어치우면서 그 궁금증에 서막이 열렸고, 의문이 풀리기는 커녕 나는 신경숙의 소용돌이 속으로 요란스레 도킹하고 말았다.

 원래 [깊은 슬픔] 상권을 읽고(자주 가는 대학 도서관에서) 하권을 주문하려던 터에 [리진]을 읽었던 터라, 생일 선물로 개정판[깊은슬픔(단권)] 받알았을 때는 조금 허탈했다.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 하는 부담도 있었고. 은서와 세와 완이라는 주인공의이름들만 잠결같이 기억날 뿐 자세한 내용들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개정판 [깊은 슬픔]은 표지가 하얗다. 나는 재독을 포기하고 책을 중간부터 펼쳤다. 세번째 장을 넘겨 읽으면서, 마술처럼
은서와 세와 완과 이수의 모든 일들이 기억의 수면위에 떠올랐다. 역시 신경숙이다.


9p
 그 여자 이야기를 쓰려 한다.
 이름을 은서(恩瑞)라 짓는다. 사랑이 불가능하다면 살아서 무엇 하나. 가끔 우는 여자. 언제부턴가 내 속에 내가 먹이를 주어 기른 여자.

19p
 무슨 일이든 기다릴 수만 있으면, 삶이란 기다림만 배우면 반은 안 것이나 다름없다는데, 은서는 웃었다. 그럴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뭔가를 기다리지. 받아들이기 위해서 죽음까지도 기다리지. 떠날 땐 돌아오기를, 오늘은 내일을, 넘어져서는 일어서기를, 나는 너를.

28p
....
 "그러나 그것뿐이에요. 곧 이렇게 돌아오고 말거든요. 돌아올뿐만 아니라 정말로 이 세상 밖으로 튕겨져나가면 어쩌나, 싶어서 급하게 방향을 돌려 달려왔던 길을 안간힘을 다해 되달려오죠. 오늘은 한강다리를 건너오는데 앞뒤로 차량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였나봐요. 난간을 뛰어넘어 물 속으로 처박히고 싶은 충동이 얼마나 강하던지 그거 참고 다리를 건너느라 너무 피로했어요. 정말이지 이런 때는요. 절대로 혼자있고 싶지가 않아요."

50p
 설령 그와 통화를 하게 되어도 이제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 같은 건 물을 힘도 없다. 그는 잊고 있을 것이다. 지나간 약속 같은 것은.
 약속? 에이츠였던가. 한때 입안에서 맴돌던 싯구절들. 그대 굳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에 / 나는 다른 이들과 사귀었네 / 하나 나 항상 죽음에 마주칠 때나 잠의 고갯마루를 애써 오를 때나 / 간혹 술로 즐거울 때 / 불현듯 떠오르는 그대의 얼굴 잊지 않았으니.

62p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어디선가 찬바람이 옷섶을 파고드는 듯 몸이 시려지는데, 어떻게 너보고만 잊어버리라고······ 은서는 저녁을 짖는 이수를 바라다보며 괜히 몸이 오므라들었다.
 해 저무는 게 무서웠던 건 그저 배가 고파서만은 아니었다. 은서 스스로 밥을 짓게 될 줄 알고 난 뒤에도 그랬다. 밥을 실컷 지어 밥상을 놓고 이수와 겸상해 앉아 배가 부르도록 밥을 먹어도 남는 허기. 불기 없는 차디찬 아랫목을 닮아 있는 허기. 집은 너무 크고 그녀와 이수는 너무 작았다. 방이 많은 집. 그중 가장 작은 방을 골라 이수의 손을 잡고 누워도 여기나 저기나 너무 헐렁했다. 둘만 입을 다물면 기척이 없는 텅 빈 여기저기.

101p
 은서는 시선을 떨구었다.
 "왜 우느냐고 왜 묻지 않는 거죠?"
 여자는 호호. 웃었다.
 "누구나 다 울고 싶을 때가 있는 거 아녜요.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에요. 나는 눈물이 안 나와. 울고 싶을 때는 많은 데, 심지어는 요, 미장원에서 손님들 머리 자르고 달라진 모습을 봐도 눈물이 핑 돌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냥 눈시울이 잠깐 더워지고 그러고는 말죠. 그쪽처럼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려본 지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기억도 안 나네."

152p
 누구나 잠든 얼굴은 연민스러운 법이지. 잠든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미워할 수가 없지. 깨어나면 같은 얼굴일 텐데 자는 동안엔 지치고 창백하고 순해 보여. 사람에게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159p
 로트렉이 십이 세 되는 생일날 아버지 알퐁스 백작은 매사냥 책을 한 권 선물했다. 이 책에다 그는 다음과 같이 친히 써넣었다. 아들에게 주는 말이었다.

 아들이여, 대기 속에서의 생활, 빛나는 태양 아래서의 생활만이 건강에 어울린다는 것을 잊지 마라. 어쨌든 자유를 빼앗긴 자는 자신마저 잃게 되어 금방 죽어버리고는 마는 것이다. 이 작은 매사냥 책은 너에게 광대한 자연 속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멋있는지를 가르쳐줄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네가 인생의 쓰라림을 맛보게 될 때 무엇보다도 말, 개, 그리고 매가 세상의 쓰라림을 다소나마 잊게 해주는 너의 귀중한 친구가 될 것이다.

245p
 "식구같이 느껴져요. 손을 잡아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그러죠. 사람으로 태어난 외로움은 자는 얼굴에 다 묻어 있죠. 그래서 사람을 미워하려면 절대 그 사람 자는 모습은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죠. 어떤 사람이건 자는 모습을 한번 지켜보게 되면 그 사람 아무리 미운 짓 해도 미워 못 해요. 안됐거든요. 자면서도 이마를 펴지 못하고 자는 이 보면 더."

248p
 "누가 그렇게 슬프게 했어요?"
 "······"
 "얘기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우선 자요.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오늘은 슬픔에 싸여 있다가도 내일은 전혀 다른 감정에 놓여질 수도 있죠. 순간순간 진정해야 할 까닭은 거기 있는지도 몰라요."

249p
 "나는 그 사람 사랑해요. 그 사람은 이제 아닌데나는 사랑하죠······ 이상한 일이죠. 그 사람이 내게서 멀어질수록 내겐 그 사람이 점점 더 중요해지니······ 지난 봄날부터 내가 더이상 그사람을 위해 할 일이 없게 됐을 때부터 쭉 해온 생각은 나는 죽어서라도 그 사람을 보살펴주고 싶단 것이었어요······ 하지만 점점 그를 위해 할 일이 없어졌어요. 알아요? 점점 만날 수도 없게 되고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멍하니 앉아 있거나 생각없이 걷거나 넘어지거나 유리문에 붇히거나 할 수밖에 없는 슬픔을."

290p
 "······ 그렇다고 사왔어?"
 "어렸을 때 이모집 개가 생각나서······ 그 사람 다음으로 나를 지켜줬지. 비가 오면 우산을 물고 학교 교문 앞에 앉아 있고, 이모부가 집을 비우잖아, 그러면 마루로 올라와서 혀를 빼내고서 씩씩, 거리며 밤새 방문 앞에 앉아 있곤 했어. 이모부 대신 식구들을 지켰던 거지. 참 우습지? 아침에 이모부가 오면 그때 마루를 내려갔으니까. 같이 나갔다가 우리가 버스를 타잖아, 그러면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다리 우리가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오곤 했어. 추운 날 끌어 안고 있으면 여기가 따뜻했었어."
 화연은 가슴을 가리켰다.

323p
 세가 말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애인하고 산에 갔었던 때 얘길 해줬었거든. 여자 집안에서 결혼을 너무반대해서 이별식을 하러 갔었대. 지금처럼 가을이었고, 도저히 헤어질 수가 없어서 산에서 이렇게 낙엽을 덮고 둘이 손 꼭 붙잡고 꼬박 밤을 보냈대. 누워 있는 두 사람 위로 나뭇잎이 또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밤 새 떨어져서 새벽에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대. 그걸 핑계로 또 하루를 그대로 누워있었대. 또 밤이 됐는데 도저히 헤어질 수 가 없어서 그렇게 낙엽 속에서 또 한 밤을 지냈대. 그렇게 사흘을 보낸 뒤에게 배가 고파서 그 낙엽 속을 나왔다고 그러더군."
 "그런 다음엔."
 "뭐가?"
 "그 선생님과 애인은 어떻게 됐냐고?"
 "헤어졌대."

378p
······
 "기다림이었어요. 내가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있었어요. 기다림이 끊어지니까 마치 나 혼자서만 외떨어진 장소에 있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아무런 기다림이 없어지기는 처음이었어요. 가능한 일이든 불가능한 일이든 마음속에 기다림이 있으면 그것에 마음을 붙여 하루를 보낼 수가 있지 않아요? 전화벨이 울리면 반갑기도 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고, 밤길을 걷게 될 때는 옆에 있겠거니 생각하며 혼잣말도 해보고요."

580p
······
 너는 너 이외의 다른 것에 닿으려고 하지 말아라. 오로지 너에게로 가는 일에 길을 내렴. 큰 길로 못 가면 작은 길로, 그것도 안 되면 그 밑으로라도 가서 너를 믿고 살거라.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엇다고 잊어버리며 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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