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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한 가지 기억 본문

틈/누군가의 한 소절

김용택. 한 가지 기억

김윤후 2009. 6. 11.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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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택 산문집 [오래된 마을] 中에서

 학교 회비를 내지 않았다는 방이 교문 앞 게시판에 붙은 지 3일째다. 오늘은 학교에 가자마자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지난주에 집에 갈 차비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걸어서 집에가지 가야한다. 길을 자갈길 14킬로다. 날은 더웠다. 길을 나서서 내가 걸어야 할 길을 바라보니, 집으로 가는 길이 굽이굽이 하얗게 멀리 아득하다. 저 멀고 먼 길을 나는 나 혼자 걸어가야 한다. 어쩔 수 없다. 걷자.
 하얀 자갈길에 불볕이 이글거리고 길은 팍팍하다. 1킬로도 가지 않아서 이마에 땀이 솟고 속옷을 입지 않아서인지 교복이 땀에 젖어 자꾸 몸에 달라붙는다. 집에 가봐야 돈이 없을 텐데······. 주저앉고 싶고 학교로 되돌아가고 싶다. 미루나무에 둘러싸인 학교가 멀리 보인다. 논과 밭에서는 사람들이 보리를 베고 모를 내고 있다. 보리 베고 모내는 철이다. 하얀 찔레꽃 덤불들이 유월의 햇살 아래 더욱 희다. 평지를 두 시간쯤 걸었다. 이제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날은 훅훅 찌고, 자꾸 숨이 턱에 찬다. 이 비탈길이 갈재다. 갈재 몰랑에 올라서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까마득한 곳에 순창읍이 희미하다. 들판이 여기저기서 보릿대 태우는 연기가 솟고 있다. 땀으로 옷이 다 젖었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 손에 먼지가 서걱거린다.
 남은 길을 본다. 이제 저 산 너무가 우리 마을이다. 신작로로 멀리 돌아가지 않고 전쟁 때 죽은 빨치산들을 묻었다는 '공동산'이라는 재를 넘는 지름길로 들어섰다. 공동산 산꼭대기에 올라서자 멀리 우리 동네를 위돌아가는 물굽이가 보인다. 우리 동네 사람들도 곳곳에서 보리를 베옥 있다. 집이 가까워올수록 나의 발길은 무겁고 겁이 난다.
 동네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의 겁먹은 얼굴을 보며 허리를 펴고 서서 나에게 무슨 말들인가를 한다. 공일도 아닌데 왜 집에 오느냐는 말일 것이다. 동네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마을 뒷산에 다다랐다. 회색으로 변한 초가지붕들이 납작하게 엎드려 뜨거운 햇볕을 받고 있다. 강 건너에 있는 우리 밭이 보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리를 베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가 조금 앞서 있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답답했다.
 집을 들르지 않고 징검다리를 건넜다. 해는 한낮이 조금 지나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우리 밭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밭 가운데에서 보리를 베고 있었다. 나는 밭 가에 서서 어머니를 불렀다. 몇 번 불러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보리 베어지는 소리 때문에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베어 눕혀놓은 보리들을 밟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어머니를 다시 불렀다. 그때서야 어머니와 아버지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나를 본 어머니가 일손을 뚝 멈추고 일어섰다. 한 손에는 낫이, 한 손에는 보리가 쥐어져 있었다. 어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자갈들이 많은 가문 맨땅을 차며 회비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내 말을 못 들었는지 아무 말 없이 다시 허리를 굽혀 보리를 베기 시작했다. 아버지 쪽에서 보리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보리 위로 드러난 아버지의 구멍 난 러닝샤스 사이로 붉게 탄 허릿가 살이 보였다. 타닥타닥 보리 베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머리에 쓴 수건을 벗더니 땀을 닦고 옷의 먼지를 툴툴 털면서 "가자!" 하며 앞서 밭을 걸어 나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어머니 뒤를 따랐다. 징검다리에 이르자 어머니는 징검다리에 서서 강물로 얼굴을씻었다. 검게 탄 얼굴이 땀 때문에 상기되어 평소보다 하얗게 보였다. 얼굴을 씻었어도 어머니 이마에는 금방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땀방울들이 투명해 보였다.
 집으로 들어선 어머니는 어디선가 보리를 한 줌 들고 나오더니, 마당과 앞 터논에서 놀고 있는 우리 집 닭들을 구구구구 불러들였다. 보리들이 마당에 툭툭 떨어지고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닭들이 마당으로 후두두두 날개를 펴고 달려 들어왔다. 어머니는 닭을 천천히 부르며 닭장 안으로 보리를 흩뿌렸다. 벌건 대낮인데도 닭들은 보리알을 따라 닭장 안으로 들어갔다. 닭들이 어느정도 닭장 안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닭장 문을 닫고 망태를 들고 오더니 다시 닭장 문을 열고 닭들을 한 마리씩 잡아 망태에 담기 시작했다.
 "가자."
 어머니가 앞장을 서셨다. 차 타는 곳까지 30분을 걸어야 한다. 들길을 지나고 마을을 지났다. 차를 타고 갈담 장으로 갔다. 점심때가 지났어도 장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염소나 닭이나 오리나 강아지를 파는 장 한쪽 구석으로 갔다. 영계들을 금방 팔렸다. 어머니는 회비하고 내가 순창으로 갈 차비를 주었다. 닭 판 돈은 그 돈이 전부였다.
 "어매는 어치고 헐라고?"
 나는 그때야 처음으로 말을 했다.
 "나는 걸어갈란다."
 나는 가슴이 꽉 메어왔다. 어머니는 빈 망태를 메고 땀을 뻘뻘 흘리고 서있었다.
 "차 간다. 어서 가거라."
 나는 차를 탔다. 내가 차에 오르자 어머니는 돌아보지도 않고 집으로 가는 신작로 길로 들어섰다. 나는 돈을 꼭 쥐고 있었다. 한참 후에 차가 움직였다. 차가 차부를 벗어나 조금 가니, 저기 조그마한 어머니가 뙤약볕 속을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내가 탄 차가 지나가자 어머니가 고개를 들어 차를 얼려다보았다. 나는 돈을 꼭 쥔 주먹을 흔들었다.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먼지 낀 유리창이 더 흐려 보였다. 앞 의자 뒤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먹이며 나는 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리만 베던 하버지 모습이 눈물 속에 어른거렸다.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들어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뽀얀 먼지 속에서 자갈을 잘못 디뎠는지 몸이 비틀거렸다.
 아! 어머니. 나는 돈을 꼭 쥐었다.
 점심을 굶은 어머니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시오리 신작로 길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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