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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우연 본문

틈/누군가의 한 소절

[김인숙] 우연

김윤후 2009. 8. 17. 11:16

김인숙 (金仁淑)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1학년 때인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상실의 계절」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함께 걷는 길』『칼날과 사랑』『유리구두』『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와 장편소설『핏줄』『불꽃』『'79-'80 겨울에서 봄 사이』『긴 밤, 짧게 다가온 아침』
『그래서 너를 안는다』『시드니 그 푸른 바다에 서다』『먼길』『그늘, 깊은 곳』
『꽃의 기억』『우연』등이 있다.

1995년 『먼 길』로 제28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2000년 단편 「개교기념일」로 제 45회 현대문학상 수상



 



 내가 신경숙 작가에게서 김인숙 작가에게로 시선이 옮겨 간 이유는 그다지 크지 않다. 신경숙작가의 『깊은 슬픔』을 읽을 즈음, 나는 애기능생활도서관 가죽쇼파에 누워 처음 김인숙을 만났다. 쇼파와 마주서있는 도서관 책장에서 김인숙의 『칼날과 사랑』이 눈에 꼳혔다. 그래 김인숙. 많은 문인들의 글들을 관통하는 감정 하나로 묶어 나온 책들 가운데서 작가 김인숙의 이름은 늘 맨 앞이었다. 그 때마다 나는 '김인숙. 누구지?' 약 3초 정도 생각했고 그리고 그것 뿐이었다. 『칼날과 사랑』의 첫 번째 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생일선물로 나는 친구들에게 책을 원한다고 단체문자메시지를 전송했다. 하나둘 답을 해왔고 알았다고 주소를 다시 전송해달라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에 참고할만한 북리스트를 말해달라는 녀석들도 있었다. 나는 곧바로 김인숙의 소설을 원한다 했고 한 녀석이 김인숙의 『우연』과 『봉지』를 보내왔다. 나와 김인숙 작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작가별로 책을 읽고 있는 요즘. 김인숙 작가의 『우연』은 요즘말로 굳초이스 였다.


15p
너무 오래 혼자 지냈다고 승인은 생각했다. 배설의 욕구가 아니라면, 그것이 성욕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 버린 것이었따. 승인은 안개 속의 도로를 느리게 달리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생각했다. 어쩌면 내 삶은, 바로 이 안개와 같다고······. 안개 속에서 점멸하는 비상등······그러나, 흐릿한 ······.

18p
공간이 넓은 카페에는 기묘한 정적이 있었다. 그런데서는그래야 한다는 묵계가 있는 것처럼 모두들 조용히 술을 마시고, 나지막하게 이야기하고, 낮게 웃었다.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치마를 입은 여급들이 가끔씩 테이블을 돌며 재떨이를 비워 주거나 불편한 것이 없는가를 물었다. 만일 승인에게 물었다면 승인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테이블을 몇 개 더 놓으세요. 그러면 안 불편해지겠군요.

20p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만한 사이라면 분명히 처음 만난 것일 터인데, 현중은 이 여자를 어디에서 건져 온 것일까. 여자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잘빠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긴 다리가 눈에 띄었다. 여자는 어쩌면, 남보다 긴 다리를 이용해 그녀에게 술과 즐거움을 줄 남자들을 구하러 다니는 거리의 여자일지도 모른다. 파리 유학생이라고 했지만, 파리는 혹시 그녀가 일하는 술집 혹은 카페의 이름이거나.

28p
화상 데이트 방에서 나와 음침한 골목길에서 승인은 잠깐 구역질을 했다. 종일토록 먹은 것이 별로 없어서인지 넘어오는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무슨 의미의 구역질인가. 돈을 주고 여자를 산 후, 번번이 그를 사로잡는 황폐감과 자기 모멸감은 이젠 정해진 순서였다. 새로울 것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는 자신이 그러할 것이란 걸 뻔히 알면서 그런 곳을 찾았고, 겪었고, 그러나 나선 잊었고, 다시 찾아갔다. 어떤 일이든 한 여자를 옆에 붙여 놓고 사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이었다.

49p
간혹 그는 자신의 삶이 오래전에 가처분되어 버렸던 그 텅 빈 건물같다고 여겨질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기억하는 것은 그 텅 빈 건물의 외로움이 아니라, 흐트러짐 없이 곱게 쌓여 가는 먼지였다. 누가 건드리기 전에는 그 자리에 그대로 묻어 흔들림이 없는······아우성도 부대낌도 없는······그러다가 가끔 어떤 술 ㅜ치한 자가 하룻밤을 지새우고 편히 떠나가는······.  나쁠 건 없었다. 얼마나 빠르고 늦느냐일 뿐이지, 어떤 건물이든 수명을 다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52p
"뭘하고 싶은 거예요, 나하고? 연애는 싫다고 했잖아요."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일에, 연애 말고는 할 일이 없는 것일까. 모든 일에 이유나 목적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피곤하다.

58p
기연은 폐 속에 박혀 있던 바늘 이야기를 할 때처럼 느닷없이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그 사람, 내게 딴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잠자리를 거부하는 거라고······. 결국은 섹스의 문제지만, 들어가 보면 믿음의 문제지. 그런데 말이에요.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몇 달 동안 계속 추궁당하다 보면, 정말 그런 건가 싶어져. 내겐 딴 남자가 있었던 거라고······. 그래, 마음을 다 바쳤던 남자가 있었지······. 그 사람 때문에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그런 남자가 있었던 거야······. 비 내리는 거리에서 하루 온종일을 기다렸던, 그런 남자가······. 그래서 남편하곤 잘 수가 없는 거라고······.」

101p
「내가 보기에 넌 좀 배가 고파 봐야 돼. 누군가에한테 지독하게 버림도 당해 봐야 하고, 하여간에 된통 당해 봐야 한다고. 그런 다음에야, 너도 생의 단맛을 알게 될 거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서둘러 아이를 낳고,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이것이 행복의 전부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우식이 승인에게 했던 충고였다.

139p
우식은 심지어 승인과 같이 사는 자취방에까지 틈만 나면 여자들을 끌어들였다. 나중에는 견딜 수가 없어진 승인이 우식에게 절교를 선언하면서 그들의 동거는 끝을 맺게 되었는데, 오랜 후에야 승인은 생각했다. 우식의 난잡했던 여자 관계도 결국 그의 절박함이었을 것이라고······. 그랬을 것이다. 만나자마자 일단 살부터 섞어 주디 않으면 안 될 만큼, 약속에 대한 기대라는 것이 전혀 무망했던 삶······.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살을 섞는 순간에는 매번 그 여자들을 목숨처럼 사랑했으리라. 섹스의 순간만이 그에게는 현존의 순간이었을 테니······.

179p
「이제까지 내가 같이 잤던 남자들도,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궁금해질 때가 있어. 어떤 날은, 내 몸이 정액에 절여진 젓갈같이 여겨진다니까. 끔찍하지 않아?」
모델이라는 직업을 갖고는 있었으나 한 번도 잘 나가는 모델이었던 적이 없는 지니는, 패션쇼나 카메라 앞에 서는 것보다는 남자들 앞에서 옷을 벗는 일을 더 많이 해야만 했던 모양이었다.

182p
「너 산다는 게 뭔지 알아? 산다는 건 말이야, 폭식증 환자가 되고 싶어도 당장 한 끼 먹을 돈도 없는 사람이 밥을 쳐다보는 눈길 같은 거야. 그게 사는 거고, 그게 슬픔인 거고, 그게 절망이라는 거야. 섹스? 순정? 제발 웃기지 좀 말라고 그래!」
카페의 사람들이 전부 쳐다볼 정도로 있는 힘껏 질러 대는 고함소리였지만. 기연은 지니가 화내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187p
그녀는 목적지보다는 늘 그 중간의 풍경에 마음을 사로잡힌다. 어렸을 때는 당장 된장찌개에 넣을 두부 한모를 사와야 하는 심부름에도 불구하고, 기연은 가던 길 중간의 놀이터에서 모래장난을 한다. 중학교 때는 버스 안에서 싸움이 붙은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책가방을 다른 사람의 무릎 위에 놓아둔 채 몸만 내려 버린다. 고등학교 때는, 그겨보다 먼 곳에 사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번번이 자기가 내릴 정거장을 놓쳐 버린다.

189p
그때 기연은 스무 살이었다. 역시 스무 살인 그녀의 친구들 중의 누구는 아침부터 밤가지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춤만 추며 백 댄서 오디션을 보러 다녔고, 누구는 밤낮없이 농구공을 튀겼고, 누구는 더 나은 대학교로 옮기기 위해 다시 고등학교 교과서에 붉은색 줄을 덧칠하고 있었고, 또 누구는 학생회 선배들과 밤낮없이 술을 마시러 다녔다. 그러나 어떤 짓을 하든 그들 모두의 스무 살은 비어있었다. 말하자면 완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춤이나 농구나 더 나은 학벌보다, 그리고 사회나 이념에 대한 관심보다 그들의 생을 보다 절박하게 걸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것 아니면 안되는 것, 오직 그것이어야만 하는 것······그들의 생이 배워 왔던 유일한 것, 세상 전체가 그들에게 한목소리로 가츠렸던 것······사랑이라 이름붙여졌으나 그보다 더욱 절박한 것, 그러나 결국 그것뿐인 것.

238p
그러나 그녀가 만질 수 있었던 것은 치욕과 경멸과 지독한 모욕뿐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바닥이라고 믿고 싶었던 그 아래에는 더 깊은 바닥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바닥이란 다 그런 것이었다. 바닥 밑에는 항상 더 낮은 바닥이 있는 것이다. 기연은 여전히, 바닥과 바닥 사이의 구멍 속에 존재했다. 그리고 후쿠오카는 바로 그 구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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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의 『우연』에서 나는 인간이 가진 숙명적인 결핍이 얼마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그 결핍과 결핍이 만났을 때 작을 이루기 위해 메워야 하는 틈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그리고 섹스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등장인물들이 안고 있는 신체적, 정신적 아픔들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나는 두세번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읽었다. 성의 허무감, 삶의 절박함이 스민 김인숙의 『우연』.

내가 읽은 그녀의 첫번 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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