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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사소한 것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의 아침, 오후, 저녁

김윤후 2009. 10. 21. 17:40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의 아침, 오후, 저녁은 그저 듣거나 보거나 하는 일들이 속을 채운다. 그저 일어나 이불을 개고 샤워를 하고 팬티를 갈아입고 인터넷을 한번 항해하고 집을 나와 버스를 탄다. 학교에 도착해서 후배를 만나고 밥을 먹고 시체처럼 팔, 다리, 허리가 잘려나간 은행나무 무덤앞 동네커피숍에서 핫초코를 주문해 마신다. 돌아와 책을 읽고 잠에 빠지며 일어나 다시 책을 보고 글을 써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의 일상은 무료하고 공허하고 고독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내가 나를 버리고 있다는 생각을 잊으려 노력한다. 오늘도 나는 나를 몇번이나 진창에 처박았나. 무능력한 나를, 지루한 나를, 쓸데없이 생각만 많은 나를. 하지만 처박아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저승사자처럼 걸어오는 나. 나는 결국 버려진 나를 들이고 또 버려질 나를 만들어 낸다. 시간들이 제 걸음으로 나아갈 때, 나는 그 시간의 뒤켠에 나를 쌓아두고 어찌할 줄 몰라 두려웠다. 바람은 늑골을 훑고 지나가고 고양이들은 대낮부터 쓰레기통과 사투를 버리는 오후. 나는 발바닥까지 내려앉아버린 정신을 추스르려 책을 펼친다.

철저하게 나를 부정하는 글을 쓰리라 다짐해본다. 나를 부정하려면 나를 인정해야 하고 인정한 후에 부정하려면 철저히 나를 걸러내야 한다. 삶에서 나를 걸러내면 무엇이 남을까. 또 무엇이 여과되어 떨어질까. 부정된 나를 써나가며 나는 한 순간도 나와 타협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며칠동안 계속해서 도서관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벌 한두마리들이 사라지고 이제는 바람의 형상만이 나뭇가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거짓을 격파하고 가식을 뭉게며, 나를 짓이겨 새로운 나를 빚으리라. 나는 이 역겨운 나를, 지저분하고 추악한 나를, 조악한 생각으로 가득한 나를 단숨에 달려가 폐기처분 할 수 있을 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의 아침, 오후, 저녁은 미친듯이 무언가에 몰두한 아침, 오후, 저녁보다 처참하고 무참하고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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