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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사소한 것들

상처

김윤후 2010. 1. 10. 19:19
 





 모든 사물은 상처다. 칠이 많이 벗겨진 개다리 소반, 이광기가 아들의 죽음을 기억하며 울고 있는 저 텔레비전, 회사를 퇴사하면서 구입한 엠피쓰리, 드럽게 새로 사고싶은 핸드폰, 상경하면서부터 우리 집 벽에서 재깍거리는 시계. 모든 게 전부 상처다. 아프고 쓰리고 눈물나고 아리고 모질다. 몇 해 살지 않았지만 내 인생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졌을 그 모든 사물이여. 그 때의 내 시간을 채워주었던 모든 이들이여. 사랑이여. 함께 했던 모든 사물들에 내려 앉아 있을 추억들이 모두 상처다.


 나는 라면 냄비를 보면 제대 후 복학생으로 살았던 2005년 겨울이 생각난다. 내겐 같이 교정을 거닐 동기가 없었고 함께 추위를 이겨낼 여우목도리가 없었고 늦은 밤 밥상에 밥공기 같이 올릴 친구가 없었다. 북적거리는 24시간 식당에 오래 앉아있기 무안해서 나는 준비가 빨리 되는 라면과 김밥을 주문하곤 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내 마음은 따뜻해졌다가 차가워지기를 반복했지만 수저와 물 그릇 사이로 받는 라면 그릇은 늘 뜨거웠다. 김은 항상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가지런히 올라앉은 콩나물은 길게 쭉쭉 잘빠진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같이 온 사람들은 마주앉은 사람과 연신 수다를 떨어댔지만 내 앞엔 빈 의자뿐 라면만이 내 유일한 대화상대였다. 거의 매일 라면을 먹었다. 그냥 라면, 만두라면, 김치라면, 치즈라면, 해물짬뽕라면, 볶음라면 등등 나는 매일 라면과 살았다. 나는 늘 혼자였고 날은 늘 추웠다. 나는 비어있었고 바람은 쌩쌩 잘도 불었다. 공부만 하는 복학생의 본분을 다하며 그해 나는 소리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라면은 내 유일한 친구였다. 라면 냄비와 늦은 밤의 라면은 나를 그 시절의 복학생으로 돌아가게 해 마음을 시렵게 식힌다.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
 모든 사물은 나 혼자만의 상처가 아니라는 것. 모든 사물은 공유되기에 상처역시 시간을 달리 할 지라도 다른이의 몸과 기억 속에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 공유된 상처가 많을 수록 상처는 덜 아플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만 많은 이가 동일한 사물에 각양각색의 상처를 담아두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 많은 위안을 던져준다. 그런 상처의 고백은 그래서 술안주로 제격이다.

 어떻게 보면 사물이, 빈 공백을 수놓은 풍경들이, 만져지지 않는 공기나 바람들이 세계를 이루는 주축, 우주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일지 모른다. 내 기억은 순수한 자신을 향한 기억이 아님에 틀림없다. 그 누군가와의 그 무엇과의 기억, 사물과의 상처와 풍경과의 상처가 뒤섞인 것이 내 기억의 총체다. 늘 내 시야에서 흘러오고 흘러가는 것들에 세상 모든 이의 상처가 묻어오고 묻어간다. 나는 그런 것들에 베인 내 추억과 상처가 다른 이들에게 베어들길 바란다. 사물로 소통하고 싶다. 내 상처로 말하고 싶다.


 주말 잠깐동안 날이 풀렸다. 겨울은 아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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