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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사소한 것들

유성의 기억

김윤후 2010. 2. 20. 15:56
 


매일 울고 매번 웃는 시간들 속에서 감정이 점점 소진되고 있다. 오랜만에 상경한 대학 동기녀석은 그의 팔짱을 낀 폴랑거리는 여자친구를 달고 나타났다. 실실대지는 않았지만 그간의 연애가 녀석에게 좋은 인상으로 남았던지 전체적으로 편안한 모습이었다. 날은 맑아 하늘에 구름한점 없었으며, 시원한 바람 속에 검은 하늘을 올려다 봤을 때 유난히 별이 잘 보이는 저녁이었다. 한참동안 자리에 서서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내곁으로 그녀석이 다가왔다. 녀석의 여자친구와.


 "뭐해?"
 "그냥."

 술을 마셨다. 간만에 들른 휘모리에서 늘 마셨던 사과소주와 늘 먹었던 모듬꼬치를 시켜놓고 녀석과 녀석의 여자친구와 마주앉아 그간 녀석의 연애담과 앞으로의 계획과 서울로 올라온 오늘 하루동안의 이러저러한 일들을 들으며 저녁은 조금씩 익어갔다. 또다른 한놈이 술자리에 추가되고 여러순배 술이 돌았을 때, 나는 중간중간 대화의 허리가 잘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좋은 얘기에 좋은 사람들이 가득한 술집에서 광석이형의 노래라도 나온다면 정말 좋았을 그 술집에서 우리의 대화는 어딘가 조금 모자란 느낌이었다. 뚝뚝 끊기는 라디오 전파처럼 빈칸같은 대화의 공백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고개를 숙였고 내 옆자리에 앉은 추가된 한놈은 담배갑을 열어재꼈다. 나는 무슨 말로 이 공백을 채워야 할 지 몰랐고 그때마다 좋다는 표정의 동기놈이 대화를 이어갔다. 내 유머는 추가되는 술병들이 날라올 때마다 전투력을 높여갔고 높아진 전투력속에 녀석의 여친의 얼굴에 웃음은 충천되었다.  

 "부럽다 임마. 너 이새끼, 너한테도 이런날이 오는구나!"
 "나도 몰랐어. 헤헤. 나한테 이런날이 오고 너한테 이렇게 얘기하는 순간이 오게 될 줄은."

 한동안 녀석은 집안의 재정문제와 불화, 자신의 과중업무, 사랑 등등의 문제들이 짬뽕되어 늘 그 짬뽕에 코를 박고 살던 나와 코드가 맞아 각자의 술자리 중간중간 나는 서울에서 녀석은 동해에서 서로의 전화번호를 누르곤 했다. 왜 힘들어하는 시간에도 동지가 필요한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와 다른 시공간에서 나와 유사한 아픔을 가지고 오늘을 버텨내고 또 내일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당시 무지막지한 위안을 받았고 틈틈이었지만 이어지는 녀석과의 통화는 알수 없이 벌어지던 내 가슴틈새를 메워주는 강력한 접착제였다. 녀석과 나와의 끈은 견실한 동아줄 처럼 굵고 팽팽했다.

"다시 만날 수 있겠지?"

 2차로 이어진 술자리에의 끝 무렵에 녀석이 말했다. 
 
"뭔 개소리냐. 너 군대가냐? 임마 언제든 시간내서 오가면 되는거고. 아님 전화라도 때리면 목소리라도 듣는 거지. 왜. 다시 안올라고?"
"아니. 그냥 일도 더 바빠지고 결혼도 하고 그러면 시간내기도 더 힘들거 같고 그래서. 지금보다도 더 만나는게 힘들어지지 않을까?"
"이새끼 이거 안되겠구만. 여자친구 생겼다고 이제 친구안볼라카네. 히히. 내가 얘기했지. 사람이 만나서 관계를 맺는 순간 둘은 끈으로 연결된다고. 시간이 흐르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관계가 이상하게 멀어질 때, 한놈이 끈을 놓아도 다른 한놈이 그 끈을 놓지 않고 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고. 걱정마라 나 실타래 이~만큼 가지고 있다. 니가 다시 놓아도 내가 갖고 있을테니까."


 길게 이어진 멎적은 말에 대화는 또 허리가 잘려나가고 공백 속에 유재하의 노래가 들렸다. '그대 내품에' 였는지 '가리워진 길'이었는지는 잘 생각이 안났지만. 녀석의 여친이 꿈뻑꿈뻑 눈꺼풀을 감아대기에 술자리를 그만 파하고 나오면서 나는 말짱한 정신을 느꼈다. 하나도 취하지 않은 정신머리. 말쑥하게 정장으로 차려입고 내 옆에 앉아 같이 부러워했던 추가된 한놈도 이상하게 취하지 않았다며 내 얘기에 말을 얹었다. 녀석을 택시에 태워 보내면서 밤은 절정으로 치달았고 내 머릿속에선 뭔가 계속 꿈틀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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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처음.
 녀석을 만나기 위해 장승앞에서 녀석을 기다리면서 나는 보았다. 달을 향해 쓰러지는, 아니 돌진하는 불빛 유성을. 나는 한동안 멍해 유성의 흔적을 훑고 있었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유성이 달의 저편으로 사라질 때 나는 남모르게 뜨거웠다. 밤은 유성을 품고 깊어갔다. 나는 그날 유성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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