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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사소한 것들

우산이 필요해.

김윤후 2010. 7. 2. 11:25


 
잊혀졌던 감정들이 동일한 경험을 매개로 고개를 쳐드는 순간들이 있다.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우산을 산다는 것은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니다. 손님들은 공중전화 부스에 지갑을 놓고 그냥 가버리는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이 점포에 우산을 놓고 간다. 잠깐 담배를 사러 온다거나 신문이나 혹은 껌을 사러 들렀다가도 비 갠 후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계산대 주변에 쉽게 흘리고 가는 사람들. 그 덕에 편의점에는 주인없이 우산통에 꽂혀있는 우산들이 널렸었다. 기상청의 예보와 반대로 살아가야겠다는 지인의 농담처럼 오지않을 것 같은 날씨 속에 갑작스런 폭우가 대지를 두들겨도 난 일을 끝마치고 우습게 우산통에서 내것인냥 우산을 빼 들었다. 편의점에서 우산이란 일회용처럼 흔했으니까.

하늘이 겸재 정선의 화폭처럼 온통 잿빛이었다. 비가 내린다는 뉴스를 볼 시간도 없었고 131 기상청 일기예보 전화번호를 누를 생각도 없이 이러다가 말겠거니 하고 집에서 나왔다. 일을 끝마치고 아침. 병원을 빠져나올 때 미칠 듯이 습한 공기가 나를 휘감는 느낌에 짜증이 솟구쳤다. 젠장. 비가 오려나. 그럴리가. 편의점에서 우산을 챙겨나오지 못했기에 나는 기상청의 예보가 언제나처럼 빗나가길 바라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김영하의 소설을 읽으며 건대역에서 내렸을 때 비가 오고 있었다. 여허. 소나긴가. 아니었다.

우산을 사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이정도 쯤이야 대인배의 자세로 걸어가리라. 한 두방울 떨어지는 빗 속에서 문자수신음이 울렸다. 점장님. 장마라는데요. ㅋㅋ 우산 사서 쓰고 가세요. 답장을 하려 회신버튼을 누르려다 폴더를 닫았다. 나는 이미 비를 맞고 있었다. 몇 개의 편의점이 보였으나 들어가지 않았다. 편의점밥 여러해 먹어온 나인데. 처량하구나.

삽시간에 시야가 흐려졌다. 정수리부터 속옷을 타고 신발 속 양말까지 흠뻑 젖은 꼴을 하고 건대 맛의 거리를 걸어갔다.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나를 후려치는 빗방울들. 안경을 벗어 손으로 얼굴을 훔치고 또 훔쳤다. 빗물로 세수를 하며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영락없는 그지꼴을 하고 있었다. 아. 배고파. 갑자기 느껴지는 허기. 문득 내 앞을 지나치는 날쌘 봉고차 한대. 그새 고여버린 물들 위로 봉고차가 지나가자 빗물이 분수처럼 날며 내 얼굴을 후려쳤다. 이런 젠장. 되는일이 없구나. 그 때 떠오른 기억.

언제던가. 오늘처럼 비를 맞고 집에 가던 날의 기억이 봉고차가 날려준 물싸대기에 섞여 내게로 넘어왔다. 기억의 저장고에 육젖처럼 숙성되어 꺼내지길 기다리던 비의 기억. 집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집으로 향하는 길목 내내 무거운 발자국 밑에 밟힐 때 나는 비 고인 웅덩이를 발로 밟는 것을 좋아했다. 어떤 것은 몇 발자국 앞에서 점프한 뒤에 힘차게 내려밟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빗물은 여기저기로 튀었고 내 신발 속은 고인 빗물에 젖어 끈적거렸다. 엄마는 집을 나가버렸으니 비가 오는 오늘 같은 날은 또 어디선가 아버지께선 술을 마시고 계시겠지. 스멀스멀 불안이 덮쳐오는 게 싫어 나는 물웅덩이마다 내 발을 담그며 장난을 쳤다. 지나가는 사람 몇은 눈살을 찌푸렸겠지. 하지만 나는 좋았다. 그 작은 웅덩이의 물이 내 무릎을 치고 내 가슴을 쳐 끓어오르는 우울의 그림자를 쓸어내려주길 바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집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을 하면 왜 자꾸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집은 멀어보이는지. 억울하게 뭔가 뺏긴 사람처럼 얼굴은 왜 또 죽상인지. 엄마는 대체 어디간건지. 엄마없는 집이 나는 왜 그토록 싫었는지. 

결국 나는 택시를 잡아탔다. 내 앞에 와서 서준 택시가 너무 고마워서 나는 택시에 타자마자 고맙다고 택시기사에게 인사를 했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연신 빗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엄마는 시골에 내려갔고 형과 작은 누나는 출근을 했을테니 집엔 아무도 없겠지. 아빠에게나 가볼까. 아무도 없는 집으로 향하는 아침에 나는 결국 생각했다. 하아. 우산이 필요해. 우산이.


- 아래 사진 어떤 사진인지, 어떤 장면인지 맞추는 사람에게 술 한잔 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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