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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봉지 본문

틈/누군가의 한 소절

김인숙. 봉지

김윤후 2009. 9. 4. 00:23
김인숙 작가의 소개글은 이전 '우연' 평의 것으로 갈음한다.


솔직하다. 빠르다. 거침없다. 종이 이곳 저곳에 상처와 결핍이 스며있고 아픔에 시선을 던지지 않는 듯 하면서도 지독히 바라보는 치밀함.
김인숙의 장편소설 '우연'을 읽고 느꼈던 감정선들이다. 두번째다. 이번에는 '봉지'다.
그전에 내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꺼내자면 네모난 모판이 떠오른다. 오리가 넘는 하굣길을 걸어 집에 오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아빠는 일하러 나갔고 분명 누나들은 할머니와 밭에서 김매느라 땀범벅이었을 게다. 형은..... 기억이 없다. 아무튼 나는 질경이를 뽑아 입에 물고 조물조물 씹어 단물을 짜내면서 엄마를 보러 갔다. 마을 시정을 지나 버스정류소가 있는 마을 외곽까지 걸어가면 동네 냇가 건너기 전에 우리 논이 있었다. 다른 사람 논이 아닌 우리논. 나는 아빠가 그 논을 우리 논이라고 부르는 게 좋았다. 한 여름 멀리서 보면 푸른 잔디 위에 흰 점으로 보이던 엄마와 아빠의 수건 두른 머리 둘. 멀리서 그 모습이 가물거릴 듯 시야에 들어오면 나는 우리논까지 단숨에 내달렸다. 엄마엄마를 부르면서 달려가면 그 먼거리에서 어떻게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엄마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수건을 벗어 두어번 흔들며 나를 반겨주었다. 뙤악볕에서 남에집에 빌려준 이앙기를 대신해 땅에 발을 박고 손으로 모판의 모를 뜯어가서 하나하나 모줄 앞에 심던 모습. 아마 내가 기억하는 모판은 내가 처음 모를 뜯어 모를 심어보던 날의 모판일 것이다. 나는 늘 학교에서 친구들과 수업이 끝난 후 빈둥거리거나 술래잡기를 하지 않고 집으로 곧장 돌아와 매일 엄마에게 갔다. 우리 논으로 갔다. 아빠는 내가 논으로 모를 던지면 무뚝뚝하게 '좋다.' 한마디 하시며 모를 들어 양손에 나눠쥐셨다. 그 시절 여름은 미칠 듯한 더위에 온통 달아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땅에 발을 박고 나를 돌아보는 엄마아빠와 바람에 고개를 돌리는, 수줍을 모들이 내는 스삭거리는 소리를 무척 좋아했다. 늘 그랬고. 여름은 항상 그곳. 우리 논에 있었다. 그 때 나는 이 모든 풍경들이 영원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김인숙 장편소설. [봉지]는 주인공 '봉지'의 성장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는 구조이다. 늘 있어왔던, 어디있겠지 짐작하는 곳을 벗어난 적이 없는 주인공 '봉지'의 유년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김인숙의 빠른 전개는 여기서도 내 눈을 끌어당겼다.




23p
봉지의 어머니는 봉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난 이 아이를 한 번도 소리쳐 불러본 적이 없는 거 같아, 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 오빠하고 딴판이었지. 그놈의 자식은 걸음마를 시작하자마자부터 오늘날까지 단 한순간도 어느 한자리에 붙어 있는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이 아이는, 어디 있겠지 짐작하면 바로 그 자리야. 고개만 돌리면 바로 거기에 있는 거야. 밥을 차릴 때나 가게에 심부름을 보낼 일이 있을 때나, 지 오빠를 불러오게 할 때나 하여간에 이 아이를 못 찾아서 애를 먹은 적은 없었어.

59p
가현아. 낸 몸속에 뭐가 들어 있는데, 그게 자꾸 터지려고 해. 가만히 있어도 시한폭탄처럼 째깍째깍 소리를 내는 거야.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는 거 같단 말이야. 그게 날 미치게 해.
 그날, 봉지는 취해 있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가현을 취해 있지 않았으나, 느닷없이 봉지의 그 말이 그녀를 취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몸속에도 그런 게 있었던 것이다. 째깍거리는 소리, 혹은 칼이 갈리는 듯한 소리, 혹은 곧 찢어질 듯 문풍지가 울리는 것 같은 소리······.

62p
봉지는 쮸쮸바를 빨아먹으며 말했다. 
 입속이 차가워지며, 달콤한 과즙이 혓바닥에 얹어졌다. 그녀는 그 차갑고도 달콤한 기분을 기억해 두리라고 생각했다. 사랑이란 건 어쩌면 그렇게 혀뿌리가 저린 차가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끈적하게 남는 달콤함······그런 모든 것들.

64p
그날 바로 그 시간에 학교 전체가 그러했다. 대통령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지 못했지만, 대통령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는 것인지도 알지 못하던 그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울었다. 대통령은 그들이 아직 집 밖으로 잘 걸어 나가지도 못하던 시기부터 이미 대통령이었으며, 그때까지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그 존재는 말하자면 불멸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인 여자이이들이 그 시간에 울음을 터뜨렸던 것은 혹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불멸하는 것도 사라진다는 거창한 명제 앞에서의 공포가 아니라, 무지에 대한 공포. 혹은, 무지가 무지와 만나 함께 안전해지기 위한 공모.

117p
몸시 추운 밤이었다. 그 추운 하늘에 별이 성기게 떠 있었다. 서울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봉지는 자신의 스무 살을 생각했다. 열아홉살의 마지막 날까지도 그녀는 자신의 생이 단지 스무 살만을 향해 달려온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열아홉 살의 마지막 날 밤까지도, 바로 이튿날 아침이면 시작될 스무 살의 세계는 미지였다. 그러나 고작 석 달이 지나기도 전에 봉지는 어느새 자기가 헐렁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춥고 가난한 자취방과 명함도 내밀 수 없는 대학, 그리고 번개탄에 불을 붙이는 추운 밤······이런 것이 그녀가 그토록이나 기다려왔던 스무살인 걸까.

133p
······
"그런데 왜 그런 걸 해요?"
"뭐요?데모요?"
"가짜 말이에요."
"취했어요? 세상에 가짜가 어디 있어요? 여기 위조지폐가 있다고쳐요. 그건 그냥 종잇장이에요. 그걸 돈이라고 주장하는 놈들이 가짜지, 종이는 그냥 종이예요. 나는 강중혁이에요. 내가 강중혁이 아니라고 주장한 적 한 번도 없어요."
"헛소리하고 있어."
 그러면서 봉지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번엔 걷잡을 수가 없는 눈물이었다.
······
중혁은 봉지를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세상에 진짜가 어딨어, 씨발. 그런거 있으면 나와보라그래, 씨발."

149p
몸속에 든 것이라고는 텅 빈 바람밖에 없던 비닐봉지. 그 찢긴 봉지에 무엇이 담길 수 있었을까. 유년의 순진했던 기억들이 찢어진 자리로 흘러 나간 후, 봉지는 그 찢긴 자리 때문에 다시는 완전히 부풀어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존재는 그것의 비어 있는 자리로부터 살아 있는 소리를 낸다. 바람 소리, 상처를 앓는 소리, 기쁨과 슬픔의 생생한 통증······만질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만질 수 없어서 그것은 모든 것이었다.

204p
"선생님."
현관에서 신을 신다 말고 봉지가 강 원장을 불렀다.
"언제나 되면, 나이가 얼마나 들면 몸속에서 바람 소리가 안 들리지요?"
"적어도 서른여섯 살까지는 들린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자정이 넘었으니까 서른일곱 살까지라고 해두자."
"끔찍해요."
봉지가 몸서리를 치며 등을 돌리자 등 뒤에서 강 원장이 다시 한 번 웃음소리를 내며, 해피 뉴 이어, 라고 말을 했다. 해피 뉴 이어······. 그랬다. 봉지의 스물두 살의 한 해가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210p
넌 아직도 어려. 감옥에 갔다 오면 민주투사가 될 수 있을진 모르지만, 어른이 되지는 못하는 거야. 예쁘다는 건 말이지, 얼굴이 아니라 그 얼굴의 빛인 거야. 강원장의 아내를 일찌감치 취해있었고,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강 원장의 얼굴은 평화로우나, 애잔해 보였다. 당신도 여전히 아름다워. 강 원장이 아내를 향해 말했고, 진영은 그 말에 이어 "그 앤 좀 이상해요. 뭐랄까······뭔가 특별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스스로도 잘 알지 못했다.

236p
세월은 환상의 깨어진 파편으로 쌓인다. 순정만화를 보고 첫사랑 체험수기를 읽던 시절에 믿었던 모든 낭만적인 사랑은, 허물을 벗고 몸이 없는 추억만을 남긴다.

269p
"선생님, 나는요."
봉지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나이가 될 때까지 어지러운 걸 참고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나는 지금 낭떠러지 위에 있는 것 같거든요."

강원장은 쥐고 있던 봉지의 손에 힘을 주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아직도 20대 초반인 이 여자아이는, 느닷없이 서른을 넘기거나 마흔을 넘긴 여자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나이는 세월을 쫓아 먹는 게 아니라는 걸 갈 원장은 알고 있다.

292p
······
내가 아는 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뿐이야. 언젠가는 끝나고 새로운 것이 시작되겠지. 언젠가는, 반드시.

314p
무성릉 위해 그녀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밤마다 자기 이야기를 써야만 했을까. 매일같이 쓰고, 매일같이 지우고, 매일같이 또 새로운 기록들을 채워나갔다. 그러는 동안 봉지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단 한마디뿐이었다. 수고했다고, 누구에게나 젊음은 설인은 열정이어서 그 생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수고하고 수고한 일이었다고······그러니 모든 생의 모든 시간들은 위대한 것이라고······그것만으로도 너의 아무것도 아닌 삶을 용서하라고······. 수호라면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을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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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건 다 필요없다.
나느 강원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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