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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본문

틈/누군가의 한 소절

신경숙. 기차는 7시에 떠나네.

김윤후 2009. 9. 23. 18:52



또 다시 신경숙이다. [외딴방][엄마를부탁해][깊은슬픔][리진]이후 다섯번째 작품. 외로울 때는 신경숙의 책을 보지 않는다는 한 독자의 이야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더욱더 외로워지기 때문이라는 신경숙의 글들.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뼈에 각인 될 깊은 절망의 기억이 눈을 멀게하고 귀를 멀게하고 나아가 기억 자체를 지워버릴 수도 있게 한다. 나 또한 그 시절의 기억이 또렷하게, 아니 희미하게라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그 시절 그 시간 이후부터 지금까지, 자고 일어났더니 1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버린 것처럼 시간을 멀리뛰어버린 그런 기억들. 아프고 시리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되살아나주지 않는 생각의 뿌리들. 그 기억 속으로 걸어가는 신경숙의 언어들은 여전히 흐리고 멀겋다.


요즘에도 나는 오늘이, 그러니까 내일이 되었을 때의 지금이 기억나지 않을 듯하여 거리를 걷다가도, 차를 마시다가도, 책을 들여다 보며 활자를 읽어내려갈 때에도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럼에도 다음날 그 기억들이 쉽게 썩어 흙 속으로 묻히는 듯 아련해질 때 나는 생각을 주저 앉히고 일어나지 못했다. 때론 잦은 음주나, 쓸데없는 공상이나, 정처없이 헤매는 시간들이 내 정신세포에 기형을 가져온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한 때 나는 텅 비어버린 것 같은 하루가 굉장히 외로웠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 등장했던 인물들은 지금 어느 공간에서 숨쉬고 있을지. 내게서 가져갔던 기억들이 어느 크기로 굴려져 그들에게 간직되고 있을 지 나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을 찾아 나서려 하기도 두렵거니와 찾아도 지금의 내게 큰 위안이나 안도감을 줄 수 없을 듯 하다. 나에게는 말이다.

신경숙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여행소설은 아니다. 잃어버렸고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던 기억으로 향한 발걸음을 따라갔다.


57p

"느끼고 싶어요. 차가운 것은 차갑게, 뜨거운 것을 뜨겁게. 내게 주어진 시간을 투명하게 느끼며 살고 싶어요. 언제부턴가 마치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듯이 살고 있는 것만 같아요."
"살다 보면 인생의 재구성이 필요한 시기가 있는 법이지. 하지만 내 말은 해오던 일까지 다 멈추고서 그렇게 확 뒤돌아봐야 하겠느냐는 거지."
"시도 때도 없이 침입하는 이 좌절감을 물리치고 싶어요 그것의 실체를 알고 나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여기에서 뭘 해야 하는지의 느낌이 얼마큼은 선명해질 것 같아요."

71p
 
 나는 무슨 일로인가 어느 부분이 훼손된 인간이에요.
 그런 인간이 지니고 있는 나약하믕ㄹ 어떻게 설명할까요. 당신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순간들은 늘 마음이 흔들이고 불안합니다. 내가 그토록 끈질기게 당신이 어디에 있는가, 를 알고 싶어하는 건 다시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지금 당신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건 나의 행복이었습니다. 내 부친이 가평에서 사향노루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었어요. 생각으로라도 그렇게 당신과 닿아 있지 않은 순간엔 늘 우리들의 관계가 곧 사라져버릴 것 같은 염려가 들곤 했습니다. 지금도 당신과 나의 자취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나를 끔찍하게 합니다. 꼭 붙들고 놓지 않으면 소멸을 막을 수 있을까요?

77p

노동하는 인간의 육체는 어디서든 알아볼 수 있다. 인간의 육체는 그 육체를 지닌 인간이 어떤 자세를 가장 많이 취하느냐로 변해가니까. 여인의 육체는 재래식 부엌 모양을 연상시켰다.

97p

어렸을 적 마음이 슬퍼질 때면 어머니에게 달려가 어머니의 이마에 내 얼굴을 대고 가만히 있었다. 또랑에서 첨벙거리다가도,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다가도 느닷없이 맥이 탁 풀리곤 했다. 그러면 죽을 힘을 다해 집으로 달려와 어머니의 이마를 찾아 내 얼굴을 대곤 했다. 어머니의 이마에 얼굴을 대고 있으면 세상에 홀로 떨어진 듯한 결핍을 밀어낼 수 있었다. 어쩌다 사향노루와 나, 둘이서만 남게 될 때면 나는 나도 모르게 사향노루의 이마에 내 얼굴을 대고 가만히 있어보기도 한다.

108p

"언젠가 내게 외로울 때가 있는가? 하고 물었지요?"
 내가?
 나는 그만 멋쩍어져서 꽃병만한 유리잔을 들어 커피를 들이켰지.
"그때 대답을 안 하셨나봐요?"
"······"
"이제야 얘기지만 그때 난 당신을 많이 좋아했어요."
"······"
"내 마음을 전할 길이 없었어요."
"······"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당신을 물그러미 바라볼 때, 그때가 내가 외로운 때였지요."

109p

"이모만큼 나이가 들어도 그래?"
 가끔씩 차창에 달라붙던 빗방울이 갑자기 세졌다. 빗방울은 이제 빗물이 되어 주르륵 흘러내린다. 빗소리가 솨아 밀려들었다가 사라지곤 한다. 회오리바람이라도 부는 것일까? 빗소리가 확 밀려갈 때마다차안은 갑자기 고요해진다. 외로움에 나이가 무슨 소용인가. 서른다섯. 몸 속의 습기가 메말라가는 나이. 만남도 이별도 새롭지 않고 처음 만나는 사람조차 언젠가 한번은 본 듯한 느낌이 드는 나이. 나는 손을 뻗어 미란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159p

차창 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나이가 드니 눈이 싫어진다고 말해서 우리 몇은 왁자하게 웃었다. 사라진 웃음. 지워진 얼굴들. 그러나 어렴풋이 묻어나는 웃음 뒤끝에 물리던 고독. 우리들은 겨우 스물이거나 하나나, 둘이었다. 그랬다. 그때의 나는 분명 흙탕물이 튀어 더러운 버스 뒷자리에 앉아 눈이 내리는 거리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때 버스 안에서 바라보던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눈발이 펄럭이던 거리가 여기일까.

172p

"10대 땐 무슨 생각을 했어요?"
"20대가 되길 바랐어"
"20대 때는 30대가 되길 바랐나요?"
"그래, 그랬어. 어떻게 알았어?"
"······"
"10대 땐 20대가 되면, 20대 땐 30대가 되면 막막하고 불안한 마음이 치유되리라, 생각했거든. 무엇인가 든든한 것이 생겨서 아슬아슬한 마음을, 늘 등짝에 멍이 들어 있는 것 같은 마음을 거둬가주리라, 그렇게 부질없이 시간에 기댔던 것 같아. 20대의 어느 대목에선가는 20대가 참 길다고 생각하기도 했지. 격정은 사라져도 편안해지리란 이유로 어서 나이를 먹었으면 했어. 서른이 되면, 혹은 마흔이 되면 수습할 길 없는 좌절감에서는 빠져나오지 않겠는가. 살아가는 가치 기준도 생기고 이리저리 헤매는 마음도 안정이 되지 않겠는가. 그때쯤이면 어느 소용돌이에도 휘말리지 않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지지 않겠는가."
"그런데요?"
"어리석었어. 무슨 생각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기댔을까. 시간은 밤에 문득 잠이 깨서 그저 가만히 누워 날을 새게 하거나, 현재진행형의 일들을 문득 지워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자버리게 하거나 했을 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평화로워지기는커녕 이제는 무슨 일을 시작해서 실패를 하면 그 실패의 영향이 내내 앞으로의 인생에 상처로 작용하게 될 것 같아 살얼음판을 딛는 것같이 조심스러워. 어쩌면 인간이란 본래 이런 것일까? 본래 어느 구석이 이렇게 텅 비어있고, 평생을 그 빈 곳에 대한 결핍을 지니고 살아가게 되어있는 것일까?"
 그가 나를 깊이 껴안았다.
"그러니까 당신이 내 옆에 있었으면 해 ······당신과 함게 있는 이런 분위기가 좋아. 정서적으로 안정이 돼."
 그가 나를 더 깊이 껴안았다.

209p

 윤은 바스락거리며 빗물처럼 웃었다.
"어디에서도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를 깍아내리지 않을 사람, 내편인 사람을, 그런 사람을 두 사람만 가지고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랬는데······ 그렇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지. 그 사람과 네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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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의 내용은 신경숙의 글 답지 않게 전개도 빠르고 흡입력이 워낙 커서 정신없이 읽다보니 감정이 닿는 곳에 줄을치지 못했다. 아쉽다.

[기차는 7시에 떠나네]라는 제목은 '기차는 8시에 떠나네'라는 노래를 운동권 학생들이 '8시'를 '7시'로 바꿔 암호로 쓰기위한데서 온 것이다. 그들은 금요일 오후에 노을다방에서 이 노래가 나오면 그 주 일요일 7시에 노을다방에 모여 그들의 운동을 이야기 했다. 노래는 대충 이렇다.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네.

11월은 당신 기억 속에 영원히 남으로.

이제 밤이 되어도 당신은 비밀을 품고 오지 못하네.

기차는 8시에 떠나고 당신은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속에 아픔을 새긴 채 안개 속에 5새에서 8시까지 앉아만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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