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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그래서 너를 안는다. 본문

틈/누군가의 한 소절

김인숙. 그래서 너를 안는다.

김윤후 2009. 9. 10. 10:49

많은 갈림길에서 오직 최악의 길만 골라 갈 때가 네게도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원에서 12시까지 공부하고 2시까지 학원 위층 독서실에서 책보다 집에 오면 아버지는 늘 술에 잔뜩 취해 거실에 앉아계셨다. 불콰해진 얼굴로 전화기를 붙잡고 마구 욕을 해댔다. 누구일까. 아무튼 그분도 참 잘못 걸리신 날이다. 엄마는 내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벽쪽으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잠든척 하고 있었다. 가방을 방안 구석에 내려놓고 늦은 저녁을 먹으려 냉장고 문을 열면 채 치워지지 못하고 층층이 널부러져 있는 반찬그릇들이 보였다. 아. 또 엎으셨구나. 매번 엎어져도 상다리 한번 부러지지 않았던 우리집 밥상. 쉽게 부러질 것이었다면 아버지께서 밥상에 화풀이하지 않으셨을까. 아무말도 하지 않았던 그 새벽에 나는 내 밥상을 다시 차렸다. 식어버린 국냄비에 불을 올리고 반찬그릇을 꺼내 밥상위에 올리면 아버지는 나를 보시며 혀를 차셨다.그시절 나는 아버지와 엄마의 치열한 싸움을 말리지 않았다. 내 방에서 들리는 거실의 거친 욕설과 비명들은 더욱 올려버린 라디오볼륨에 쉽게 묻혔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귀를 막고 자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두어시간을 아버지는 엄마의 짧은 배움과 꺼내지 말아야 할 외가의 치부들을 꺼내 즈려밟으면서 서서히 잠드셨다. 나는 묵묵히 밥을 다 먹고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조용히 일어나 거실로 나갔고 요를 펴 다시 돌아누우셨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고 그랬으며 그땐 매일이 그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모르게 펑펑 울고나면 그만인 줄 알았던 그때. 나는 사지로 내몰리는 죄인처럼 늘 가슴한켠이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삶은 어디론가 가버린것 같았다. 나는 나를 안아줄,  괜찮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아직 희망이 있을 거라고 말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

 "인호야··· 나, 왜 이렇게 된거니···"
 잠시 후 완기가 끝이 잘렸던 말끝에 그런 말을 이어붙였을 때, 인호는 물론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꼬마 완기의 어깨를 따듯하게 안아 주듯이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품고, 눈물같이 내리는 봄비를 바라볼 뿐이다.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무엇이 나를 이 빗속에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을까.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르지만, 너를 이렇게 안는 순간 이것만큼은 알겠다. 아직도 내겐 누군가를 사랑할 만한 힘이 남아있다는 것···내가 지금 너를 이 빗속에서 안을 수 있듯이 완기, 너 역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거··· 이 비가 그치면 또다시 해가 돋듯이, 우리의 청춘이 저문 뒤에도 또다시 시작되는 건 있다는 거···그래서 너를 안는다. 너를 내 몸처럼 안는다.
"인호야···"
 아무 감동도, 아무 저항도 없이 인호에게 다만 안긴 채로, 완기가 이어 말했다.
"난···힘이 없다···."
"나한테 기대. 괜찮아."
"인호야···"
 다시 한 번 인호의 이름을 부른 완기는, 그러나 말을 잇는 대신 인호의 어깨에 머리를 놓았다.

······

무슨 까닭인지, 그 무구한 소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인호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져 내렸다. 괜찮아, 모든게 다 잘될거야. 난 그걸 알아. 인호는 완기에게 하듯이 말을 속삭였다. 쓸쓸해 할 필요는 없는 거야. 세월은 그냥 흘러가도 또 다른 세월이 오는 거니까. 한 시기가 지났다고 해서 모든 게 다 그렇게 끝나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쓸쓸해 할 필요는 정말 없는 거야. 인호는 눈을 감았다. 인호 역시 완기처럼 잠을 자고 싶다고 생각했다. 비는 곧 그칠 것이다. 그리고 비가 그치고 나면 해가 비칠 것이다. 그들은 그 언덕 위, 하늘이 가까운 마지막 땅에서 또 한 번의 햇살을 맞이할 것이다. 그 다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할 것이다. 어떻든 중요한 것은, 지금 인호가 완기를 안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 김인숙의 [그래서 너를 안는다] 중에서


전개의 긴박함, 지독한 감정선, 끝으로 몰아넣는 상황 등 그녀의 책이 가진 매력이 여기에 다 들어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녀의 책 중 제일 심적 짜증을 많이 느껴야 했다. 그 짜증은 내 안에서 온 것이기에 더욱. 그래도 완기야. 넌 안아줄 여자애라도 있지.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울분. 아아. 진정 울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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