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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꽃의 기억 본문

틈/누군가의 한 소절

김인숙. 꽃의 기억

김윤후 2009. 10. 7. 12:27


내 안의 욕망이 고개를 드는 순간에 나는 버티기 보다 쉽게 무너져 내렸다. 술자리에서 취기를 이기지 못함에도 계속 술잔에 술을 따랐고, 이른 새벽 봉두난발로 침대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간에 잠을 이기지 못했고, 삶의 곤궁 속에서도 그녀와 방탕한 사랑을 즐겼다. 절제, 인내, 중용의 덕들은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썩은 욕망의 탑이 세워졌다. 나는 쉽게 무너져 내렸다.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반갑게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그 경험이 숨겨야만 하는 경험이고, 그 경험의 치부를 감쌀 포장지가 너무 가볍다 싶으면 경험의 공감대는 거부감을 만들어 낸다. 또 다른 더러운 내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은 내 심장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직접 보는 것처럼 역겹다. 그냥 싫은 것이다.

[꽃의 기억]에서 박경진은 내가 싫어할 수 밖에 없는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쳐드는 욕망의 자아를 늘 부정하려 했고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만 술에 취한 어느 저녁이면 광적으로 치달았던 섹스의 기억과 자신을 찢어 발기고 싶은 욕망이 뒤섞이면서 외부의 자신을 놓아버리곤 했다. 아. 지독한 오마주.
김인숙은 사랑 앞에서 언제나 잔인하다.


66p

........
원하는 대로 남자를 만나고 , 원하는 대로 밤새워 술을 마시고, 원하는 대로 아이를 혼자 재우고, 원하는 대로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만을 좋다고 말하고······원하는 대로 욕설을 내뱉고, 원하는 대로 싸움을 걸고, 원하는 대로 아무 데서나 주저앉아 오줌을 싸라고 말하는, 내 안의 두더지 머리들. 나도 가끔은 그것들의 야유와 아우성으로부터 쉬고 싶어지는 것이다. 오직 바깥의 나, 로만 존재했던 예전의 내 모습으로 말이다.

107p

- 너 고스톱칠 때 민폐 끼친다는 말 알지? 세상살이라는 게 그렇게 생각될 때가 있더라. 저 혼자 미련한 걸로 끝나는 게 아니야. 세상이 이만큼 교활하게 돌아가면 저도 그렇게 돌아가야지. 그렇지 못하면 다른 놈들한테 민폐인 거야.
 허공을 바라보며 나는 이 선배의 말을 떠올렸다. 물론 알고 있다. 이 선배의 그 말이 나에 대한 비난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118p
······
"술을 좀 줄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약 뚜껑을 열어놓고, 물컵을 옆에 내려놓으며 낯선 목소리는 다시 낮게 말한다.
"집에 있는 술병도 전부 치워버리시구요. 위로가 되지 않는 술은 독이에요."
"늙은 아버지 같군요."
 눈은 뜨지도 않은 채 몸을 옆으로 돌려 누우며,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잠깐 몸을 뒤채는데도 온몸의 뼈마디가 쑤셨다. 전시회 오픈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연일 초긴장 상태였고, 또 연일 폭음이었다. 술말고는 긴장을 풀 수 있는 일상이 없다는 것······이미 술의 힘을 알아버린 혼자 사는 여자의 생활이란 건 그런 것이다.
 위로가 되지 않는 술은 독, 이다······나는 남자의 말을 속으로 중얼거려본다. 그러나 위로가 되지 않는 모든 것은 독, 인 것이다. 아니 때로는 위로가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독, 인 것이다.

143p
······
-- 사람, 사랑······아직도 그런 거 에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까? 하긴, 예술이니 그림이니 그 따위 것들을 믿는 사람보다는 낫겠습니다만.
 최성택의 연극적인 대사가 떠올랐다. 그리고 우진석의 얼굴도. 우진석에게는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당신을 만났던 건,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서가 결코 아니었다고. 그러나 이 말에는 사실보다는 거짓이 훨씬 더 많다. 결혼하지 않을 사람과는 절대로 만날 필요가 없고 더군다나 잠을 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결혼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결국엔 똑같은 것이 있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만남에는 그것이 연애인가 아닌가 하는 구분만이 있을 뿐이고, 연애의 끝에는 이별이 있거나 결혼이 있을 뿐이라는······ 그 구태의연한 진실 말이다.

216p

--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
그가 떠나던 날, 아이가 잠들기 직전에 했던말, 그것이 끝이었다. 아이는 입을 다물어버렸고, 다시는 자기만의 공상으로 요술을 꿈꾸지 않았다.
 나 역시 아무것도 꿈꾸지 않는다.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꿈은 나를 고독하게 만들고 나를 벼랑에서 떨어지게 만들고 꿈은 나를 비명지르게 만든다. 비록 늘 혼자였으나, 내가 바닥에 납작 엎드리지 않은 채 서있거나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내게 말을 거는 꿈에 대해 한사코 대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아무 일도 없었답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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