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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각질. 강윤미. 본문

틈/詩가 있는 땅

골목의 각질. 강윤미.

김윤후 2010. 2. 1. 18:16


골목의 각질

                  강윤미






골목은 동굴이다

늘 겨울 같았다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었다

누군가 한 사람만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공용 화장실이 있는 방부터

베린다가 있는 곳까지, 오리온자리의

1등성부터 5등성이 동시에 반짝거렸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표현처럼

구멍가게는 진부했다 속옷을 훔쳐가거나

창문을 엿보는 눈빛 덕분에


골목은 활기를 되찾기도 했다

우리는 한데 모여 취업을 걱정하거나

청춘보다 비싼 방값에 대해 이야기했다

닭다리를 뜯으며 값싼 연애를 혐오했다

청춘이 재산이라고 말하는 주인집 아주머니 말씀

알아들었지만 모르고 싶었다

우리가 나눈 말들은 어디로 가 쌓이는지

궁금해지는 겨울 초입

문을 닫으면 고요보다 더 고요해지는 골목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인기척에 세를 내주다가

얼굴 없는 가족이 되기도 했다

전봇대, 우편함, 방문, 화장실까지

전단지가 골목의 각질로 붙어 있다 붙어 있던

자리에 붙어 있다 어쩌면

골목의 뒤꿈치 같은 이들이

균형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굳어버린 희망의 자국일 것이다


[출처]
2010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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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한순간을 잊지 못하게 하는 시 쓰고파

 마을에는 구멍가게만 있었다. 나는 버스를 타기로 작정했다. 언젠가 엄마와 시내에 나갔을 때 미리 점찍어둔 곳이었다.
 
그곳에 가기 위해 나는 몇 번째 정류장에서 벨을 눌러야 할지 기억을 더듬었다. 몇 달치의 용돈을 주머니에 품고 마을을 벗어나는 일.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여행이었다. 
  문방구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바비인형의 옷들을 만지작거렸다. 여행의 목적은 가장 예쁜 인형옷을 사는 것이었기에 대충 고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행지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듯 그렇게 한참을 궁리했다는 이유로, 나는 나만 모르는 도둑이 되어 있었다. 오래 들여다본다는 게 도둑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언가를 훔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딱히 무엇을 훔친 줄도 모른 채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것들을 골라 내 수첩 속으로 옮겨왔던 것 같다.
 나에게 시를 쓰는 일은 그랬다. 문방구 주인아저씨 같은 시에서 도망치고 싶었고,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천성의 덜미는 늘 시에 붙들렸다.
 
이제부터 나의 시들은 누구 말대로 놀라운 관념의 현혹이 아닌 존재의 한순간을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심사위원 선생님, 고맙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시인이 되겠습니다. 원광대 문창과 교수님들, 박성우 선생님과 전동진 선생님께도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강연호 교수님,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어머님, 건강하세요. 동생 윤정아 수복아, 고마워. 내 시의 첫 번째 독자인 엄마 아빠, 사랑합니다. 나의 다른 이름인 정배씨 그리고 다솜, 물푸레나무 그늘 아래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계절이 따뜻해져 옵니다.

▲1980년 제주 출생
▲원광대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2005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7년 광주일보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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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말 즈음에 공모를 시작한 각종 신문사의 2010년 신춘문예 당선 시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시. 강윤미. 80년생. 나는 81년생. 깊이가 다른 것일까. 나도 시 잘쓰고 싶다.

 습작처럼 이곳저곳에 갈겨놓은 시들은 많았지만 주워모아 다시 외보면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 유치한 단어들의 조합일 뿐 잘난 구석 하나 보이지 않는 것들 뿐이었다. 나 좋아서 쓰는것이라고 생각했던 10대 후반과 잘썼다고 칭찬받아보려 그려냈던 20대 중반을 건너 이제 30대 초입인데 시는 개뿔, 시 아들내미도 낳아보지 못한 우울한 서른. 이 시를 읽고 위안받은 청춘의 허무를 다들 느껴봤으면 좋겠다. 참말로 시는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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