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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 폭염. 2010 신춘문예 당선시집 중에서. 본문

틈/詩가 있는 땅

박성현. 폭염. 2010 신춘문예 당선시집 중에서.

김윤후 2010. 4. 24. 03:17
 




한 때, 시인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이 나 말고 또 있을까. 한 곳만 보고 경쟁하던 고등학생 시절, 나는 훗날 문학 소년으로 남고 싶어 늦은 저녁 학교 건물 5층 도서관 구석에서 좋아하던 시들을 필사했다. 스프링 연습장을 사고 예쁜 색연필이나 꾸미기 좋은 펜들을 가지고 다니며 시간이 나면 종종 예쁘게 시를 적었다. 가끔 너무 자주 했다 싶은 축구가 술 취한 다음날의 반찬 처럼 텁텁해질 때, 교정 계단에 앉아 시를 소리내어 읽었다. 나는 내가 시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시를 알고 있다는 말이 무척 건방져 보이지만 당시 시는 다른 아이들과 나를 구별지어주는 하나의 선이었다. 굵고 커서 넘볼 수 없이 견고한. 나는 아무에게도 시를 알고 있다고, 가끔이지만 쓰기도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써놓고 읽어보고 또 읽어봐도 얼굴이 화끈거릴만큼 창피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시를 이야기 해버리면 혹여나 다른 녀석들도 시를 알게 될까봐, 그래서 나와 같은 존재로 승급(?)할까봐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 나는 그렇게 시를 좋아했다. 그렇게 나는 나중에, 어른이 되서 마음껏 날아다닐 때가 되면 시인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첫사랑의 그녀가 내 기다림을 무참히 버리고 현관문을 열어주지 않았을 때는 더욱.

 두번 째로 찾아온 사랑에게 나는 2년이 넘게 필사해온 시들을 모아 - 무려 3권의 스프링 노트 - 늦은 밤 뚝방에서 몰래 건넸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권의 시노트 중 한권은 사랑하는 그녀의 친한 친구에게 주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만 나오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눈치가 있지, 그녀는 나도 안면이 있는 친한 친구를 달고 나왔다. 누구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방송에서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하기 힘든 일이었기에 나는 그 사실을 들킬까봐 오버하고 너스레를 떨며 세권 중 한권을 그녀의 친구에게 줘버렸다. 두 번째 사랑했던 그녀와도 결국 해피엔딩을 맺지 못했지만 그렇다해도 그 때의 그 일은 아직도 아쉽기만하다. 그녀의 친구에게 준 시노트의 맨 마지막장에 내 자작시가 있었기에 더욱이. 그 두 번째 사랑은 다음달에 웨딩마치를 올린다.

 아버지를 병원으로 몰아넣고 나는 아버지의 방에서 잠을 잔다. 썰렁한 방에서 아버지는 굳어버린 반쪽을 눞이고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나는 아버지 방에서 잠을 청한 첫날부터 쉬이 잠들지 못했다. 잠들지 못하는 어느 새벽녘에 나는 머리맡의 책장에서 박스 하나를 꺼냈다. 스탠드 불빛 밑에서 열어본 빨간 박스에는 유년의 기억들이 가득했다. 국민학교 졸업장, 생활기록부, 중고등학교 성적표, 그리고 아버지 사진과 여러 상장들. 그 때, 상장들 사이로 눈에 띄는 종이가 보였다. 중학교 삼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운문부 장원을 했던 상장. 그 상장을 가로들고 나는 한참동안을 바라다보았다. 시를 지어 상을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오래도록 잊어버리고 있었다. 벚꽃 날리는 어느 해 봄이었던가. 어떤 시를 지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어머니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이 어렴풋하다. 살짝 웃음이 났다. 내가 시인이 된다면 이 사실을 꼭 내 첫 시집의 약력에 넣으리라. 아마도 나는 운문부 장원상을 전교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받았을 때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날 나는 조금 깊게 잠들었다.

 오래도록 시간은 중첩되어 그 때보다 머리가 몇개는 더 굵어진 대학시절 어느날, 나는 다시 시를 쓰고싶어져 스프링 노트를 구매했다. 첫장에 이렇게 적었다. '청춘의 비망록'. 당시 나는 '비망록'이라는 단어에 요즘말로 꽂혀있었다. 나는 혈기왕성했고 불끈한 청춘이었으며 '청춘'이라는 말에는 '비망록'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장을 펼쳐 시를 썼다. 무작정 제목을 적어놓고 멋진 말들을 끼워넣어 조잡스런 시를 완성했던 기억. 세 번째 장으로는 넘어가지 못했다. 그 시노트는 내 기억으로 그렇게 세 번째 장을 다 채우지도 못한 채 버려졌다. 혈기왕성했고 불끈했으며 청춘의 한복판에 서있었지만 나는 시를 쓸 수가 없었다. - 이렇게 얘기하니 무슨 시인이나 된 듯 싶다. -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생각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찼던 생각의 시기. 나는 생각으로 가득차 매일 아침 머리를 싸매고 일어났고, 내 위치를 생각하다 이리저리 헤맸으며, 어지러운 생각과 머리를 달래려 매일을 술로 지샜다. 사랑이라고 적어놓고 이별이라고 읽었으며 웃음이라고 써놓고 눈물이라 소리냈다. 충동적으로 써보려던 시는, '청춘의 비망록'이라는 글자만 남기고 과도관 어느 쓰레기통에 쳐박혔다. 그 때, 내가 시를 썼더라면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까. 시를 읽고 시를 쓰며 시를 가슴에 담아두었다면 내 삶은 그 이후로 평탄해졌을까. 내게도 사랑이 왔었을까.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시도 하나 쓰지 못한채 군대로 도망쳤다.

 2010 신춘문예 당선 시집을 사고 나는 지하철 안에서 책을 꺼냈다. 책 표지에는 신춘문예 주최신문사와 당선자들의 이름이 세로로 나열되 인쇄돼있었다. 당선자들의 이름 옆에는 동그랗게 당선자의 사진도 있었다. 책을 펼치기 전에 그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젋고 늙고 세련되고 촌스럽고 여성이고 남성이고를 떠나서 나는 그들의 사진에서 시를 향한 나의 갈증을 보았다. 시를 잘 쓰고 싶은 것에 대한 갈증, 시를 읽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갈증이 아니라 그저 시 자체에 대한 갈증이었다. 나는 배고프고 가난한 아이가 학교 수도를 틀고 갈증을 채우는 심정으로 시집을 열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시가 내게로 쏟아졌다. 감당할 수 없는 시의 홍수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인들은 시로 사랑하고, 시로 이별하고, 시로 추억하며, 시로 아파하고, 시로 위로하며, 시로 시기하고, 시로 희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로 모든 일을 하고 있었다. 나의 갈증은 그러한 사실로부터 조금씩 해갈의 조짐을 보였다. 나는 천천히 시의 바다에 발을 담궜다. 



 생각해보면, 그래, 시는 일상이었다. 아니, 내게는 일상이어야만 했다. 시는 다른아이들과 달라보이기 위해 필사하던 그 시절에는 내 우월감의 표현, 그녀에게 전달했던 시노트에는 사랑의 떨림, 운문부 장원상장에는 시인이 되고 싶다는 작고 소박한 꿈, 그리고 불안한 청춘의 심장에는 큰 시련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는 내게 시원한 바람이 되었다.

 나만 몰랐지 시는 쭉 내 옆에 있었다. 늘 나는 왜 이모양인지.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멍청하게 왜 이토록 모르는지. 특별할 것도 없는데. 내 뒤에 있던 시. 내 옆에 있던 시. 내 위에 있던 시. 나를 감싸는 시는 이렇듯 언제나 따뜻하다는 사실을 왜 나만 몰랐을까.






폭염




박성현
2010 중앙일보 신춘분예 시부문 당선작





아버지가 대청에 앉자 폭염이 쏟아졌다.

족제비가 우는 소리였다. 아버지는 맑은 바람에

숲이 흔들리면서 서걱서걱 비벼대는 소리라 말했다.

부엌에서 어머니와 멸치칼국수가 함께 풀어졌다.

땀을 말리며 점심을 먹는다.

아버지의 눈을 훔쳐본다.

여자의 눈을 쳐다보면 눈이 뽑힌다는

아랍의 무서운 풍습을 말한다. 석류가 터질 때

아버지는 다시 아랍으로 갔다. 그리고 어머니는

빗장을 단단히 채우고 방을 나오지 않았다.

세밑까지 어머니는 화석이 되어 있을 것이다.

기다리면 착해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내게는 마음이 없고, 문도 없었던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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