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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공무도하. 본문

틈/누군가의 한 소절

김훈. 공무도하.

김윤후 2009. 11. 2. 18:35
 




 현실은 늘 질척거린다. 진창 속에 발을 담그고 가뿐 숨을 쉬는 사람들은 오늘을 견뎌내기가 힘겹다. 누군가는 태어나고 또 누군가는 죽어나가는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바람은 불고 비는 내리고 해는 뻘겋게 아가리를 벌리고 떠있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그 발버둥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안쓰럽다. 말 되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말들이 해무海霧되어 그림자를 잠식하고 삶은 그 속에서 연명해 나간다. 나는 현실을 현실로서 받아들이고 되어질 수 없는 것들을 말로써 잡아두려는 어중이다. 그러나 김훈의 글 속에서, 말들은 세계를 해체하고 날아가는 새들을 그저 풍경으로 놔두는 말들이었다. 하나마나 한 말들을 하면서 하나마나 한 삶을 노래하는 김훈의 언어들은 늘 나에게 무서운 집중력을 요구했다. 그의 문장들은 현실 속에 뿌리를 깊게 내린 고목이었고 늘 마시는 물이었으며 거부할 수 없는 바람이었다. 그의 책은 맨몸과 맨정신으로 맞서지 않으면 헤쳐나갈 수 없는 거대한 숲과 같았다.

 기자라는 직업의 속성은 무엇일까. 무엇이든 기록해야만 하는 존재. 개인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진실의 끝을 향한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쓰고 또 써야 하는 사람. 그의 말처럼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일이기에 지나칠 수 없는 답답함'을 늘 간직해야 하고 그 속에서 지쳐가는 직업. 그래서 기자는 늘 진창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그래서 늘 허우적 댄다. 이때 기자의 속성은 세상을 향한 소리없는 허우적 거림 정도.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 그래. 정말 그는 강을 건너 어디로 가려 한 것일까. 그의 말대로 우리는 강 이편에 서서 강 저편을 향해 눈길만 보내는 속인들이기에 나는 그가 강을 건너 어디로 가려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말로써만 건넜고 생각 속에서만 노를 저었고 꿈 속에서만 그곳에 존재했다. 눈을 뜨면 또 오늘이었고 지긋한 현실이었고 매일 죽음이 날으는 전쟁터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또 말로만 건너고 생각하고 꿈꾸었다. 그의 책 [공무도하]의 시작은 이렇다.


님아 강을 건너지 말랬어도
기어이 건너려다 빠져 죽으니
어찌하랴 님을 어찌하랴
_여옥의 노래


 
'기어이'라는 말 속에는 투철한 간절함이 베어있다. 강 저편에 무엇이 있었길래 그는 '기어이' 강을 건너려다 죽어버린 것일까. 무엇이 '기어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인가. 나는 '기어이' 살아서 어디로 가려 하는 것인가.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다들 떠나는 곳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온 곳을 잊지 못해 식음을 전폐한 바다사자. 그리고 떠남과 돌아옴의 공간에서 새로운 삶의 끈을 묶기 시작하는 사람들. 그들은 늘 '기어이'살아가는 존재다. 어찌하랴. 이것이 현실이고 이곳이 진창인것을.

 그의 글에서 등장인물들은 늘 연결고리를 가지고 등장한다. 특별한 일화나 장치가 필요하지 않아도 연결되는 그들의 삶은 현실과 닿아있다. '기어이'살아서 건넌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그의 글 속에서는 모두 연결고리를 맞대고 있다. 무심히 이어지고 무심히 진행되는 듯하면서도 치열하게 그들의 삶을 조명하고 또 놔두려는 듯한 그의 글길 하나하나에 나는 늘 긴장했고 눈물 흘렸으며 안도했다. 김훈은은 아직 진창에서 글을 쓴다.





38p
장철수를 숨겨준 대학 선배는 항만노조파업 때 노동쟁의조정법상의 제3자 개입금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나 있었다. 그는 제3자 개입금지법 위반의 전과2범이었다. 후배들은 그의 별명을 '제3자'라고 불렀다. 제3자란 없다. 당사자가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은 모든 인간의 당자사이다. 라고, 풀려난 그는 술자리에서 소리질렀다.

73p
맑은 날 노을이 내릴 때 바다의 비린내는 가볍고 날카로워졌는데, 노인들은 먼 노을 쪽에서 간장 달이는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96p
- 일연은 무너진 황룡사의 잿더미와 그 참상에 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일연에게는 그 잿더미는 기록할 만한 가치에 미달했던 모양입니다. 일연은 오히려, 애초에 황룡사를 지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었던 유토피아의 원형에 관하여 썼습니다. 부서질 수 없고 불에 탈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그는 썼습니다. 이것이 당대의 야만에 맞서는 그의 싸움이었습니다. 저는 [삼국유사]에수록된 많은 노래와 이야기들은 그가 한 생에 걸친 유랑의 길 위에서 채집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노래와 이야기 들은 모두 잿더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에는 야만과 살육의 시대에 쓸리며 소진되었지만, 원리와 현상이 다르지 않다고 믿었던 점에서, 그는 행복한 인간이었습니다.

 131p
 헤아릴 수 없는 죽음과 끝없이 되풀이되는 죽음 중에서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죽음은 저 자신의 죽음 뿐일 테지만, 그 죽음조차도 전할 수 없고 옮길 수 없어서 이해받지 못할 죽음 일 것이다.

220p
- 박옥출, 그 전직 소방관은 해망으로 와 있더군. 물밑 고철을 건져서 파는 사업을 한대.
- 불쌍하구나, 다들. 하지만 너하고 관련 없는 사람들 아냐?
- 관련이 없기 때문에 더 답답해. 막막하고.
- 내버려둬. 그냥 내버려두는 게 가장 옳을 거야.
- 내버려두지 않을 수도 없으. 차장은 막 욕을 하더군.
- 누굴 욕해? 방천석을?
- 몰라. 그게 그 사람 버릇이야. 대상이 누군지도 모를 욕을 늘 해대지.
- 욕이 아닐 거야 신음이겠지.
 문정수가 욕실로 들어갔다.

······

한밤중에 라면을 끓여서 나누어 먹으면서 대파와 달걀과 라면 국물과 파미르 고원에 관하여 주고받는 이야기는 하찮았지만 거기에는 하찮음만큼의 위안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문정수가 놓쳐버린 것들. 혹은 놓아버린 것들을 향해서 괜찮아······ 내버려둬······라고 말해주는 일은 평화로웠다. 그 평화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연민일 것이라고 욕실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노목희는 생각했다.


덧붙이며. 김훈은 책 연재(그는 이 소설을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 연재했었다.)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 그는 언제나 뒤채이는 세상 속에서 함께하자고 말한다. 나는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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