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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도가니. 본문

틈/누군가의 한 소절

공지영. 도가니.

김윤후 2009. 11. 4. 18:12




내가 안개를 본적이 있던가. 서울엔 안개가 없다. 안개는 서울 길바닥에 산재한 꽃집에만 안개꽃으로 존재한다. 내 기억속의 안개는 고향의 안개다. 이른 아침, 아궁이에 장작이 불을 뿜고 솥에서 김이 오를때 나는 고소하고 기름진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깼다. 그리고 부시시한 눈을 비비며 문을 열면 마당엔 온통 안개가 내려있었다. 어디선가 닭울음소리 들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할머니는 밥그릇에 개밥담아 내려놓고 계셨다. 백화가 밥그릇 할짝대는 소리가 꿈처럼 들려오고 아버진 아침부터 온대간대 없었다. 내게 안개는 포근한 솜이불 같았다. 안개 뒤편엔 꼭 아버지가 털털거리는 경운기를 몰고 집으로 오고있을 것만 같았고 우리집 백화 - 녀석의 털빛이 하얀 꽃을 닮았다 하여 할머니께서 지으셨다. 할머닌 4년전에 돌아가셨다.  - 가 꼬리를 찰랑거리며 할머니께 앞발을들어 안기면 녀석의 거무스름한 발바닥과 짙은 눈만 허공에서 바둥거렸다. 안개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으면서도 나는 안개가 좋았다. 무섭다기보다 친숙했고 차가웠다기 보다 따뜻했다. 어머닌 그런 아침이면 내게 말씀하셨다. '안개맞고 잠좀깨야지'. 안개를 맞으면 잠이 깨어질까.  


안개 속에서 서울은 차가 멈춘다. 경적은 울리고 사람은 빠른 발을 옮긴다. 부딪히는 어깨에 짜증이 묻고 오늘 하루가 제대로 돌아갈 것 같지 않은 근심에 가슴은 무겁다. 내가 생각하는 안개는 서울엔 없었다.

공지영의 [도가니]에서 안개는 음흉하고 두렵다. 외진 곳에 우뚝서있는 자애원을 휘감은 안개는 천년을 두고도 자욱할 것 같아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처럼 공지영의 [도가니]에서도 글의 끝까지 안개는 걷히지 않는다. 답답하고 막막하다. 안개속엔 너는 없고 너를 모르는 내가있다. 안개 속에서 혼자란 얼마나 공허하고 혼란스러운지.

54p
'솔직히 말해. 너는 서유진에게 말했듯 세상에 좋은 일을 하기위해서 여기 온 게 아니야. 너는 월급을 받기 위해 왔을뿐이야. 물론, 월급 받으면서 좋은 일 한다는 건 좋은 일이지. 오케이! 하지만 거기가지라구. 서른네 해를 살고도, 그렇게 수업이 패배하고도 아직 그걸 모른다면 너 역시 지적장애 3급 판정을 받을 거야. 그러면 동사무소에서 기본연금은 나오려나. 농담이야. 그러니 이제 적당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에게 물어보고 그리고 돌아서서 적당히 모른 척하며 여길 빠져나가. 그만하면 넌 너의 할 바를 다했어. 대답하지 않은 건 아이들이라구. 어차피 넌 어제 여기 도착했고 아무것도몰라. 추리영화 찍냐? 인마!'

장애우들은 안개 저편에서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후 짓밟혔고 다시 일으켜 세워졌으며 성기에서 가슴, 그들의 생각까지 파헤쳐져 널부러졌다. 안개의 이편에 있는 나는 내 유년의 안개를 떠올릴 수 없었다. 할머니의 숨소리와 백화의 움직임소리, 아버지의 경운기와 어머니의 채근을 상상할 수 없었다. 답답했다. 막막했다.

189p
"민주화되고 나면 더이상 이런 일 안할 줄 알았어요. 화가 난다기보다는 뭐랄가요? 견고한 저 성벽이 정권이 바귄다고 변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예수가 다시 온대도 또 십자가에 못박혀 죽겠구나 싶기도 하구요. 저런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또다시 예수를 죽이겠죠."

무진의 안개 속에서 이야기는 극으로 치닫는다. 안개 속에서 진실은 말라비틀어지고 헛된 말들이 난무한다. 끝내 안개는 걷히지 못한다. 재판은 패하고 인호는 도망친다.

246p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지? 하고 누군가 물으면 그녀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거짓말.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세상이라는 호수에 검은 잉크가 떨어져내린 것처럼 그 주변이 물들어 버린다. 그것이 다시 본래의 맑음을 찾을 때까지 그 거짓말의 만 배쯤의 순결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안개는 걷히겠지만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무형의 안개는 시간이 지나도 걷히지 않는다. 안개를 걷어줄 사람도, 법도, 예수도 이곳에 없다.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선 안개의 이편에 있는 사람이 안개의 저편으로, 혹은 한개의 저편에 있는 사람이 안개의 이편으로 건너오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흥분의 도가니, 광란의 도가니, 욕정의 도가니, 그리고 안개의 도가니 속에서 나오는 길은 그것밖에 없다. 안개 속에서 혼자인 나를 발견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일, 정신 바짝 차리고 밖으로 나오는 일 밖에는. 안개 속에 있어본 자만이 안개 밖을 알 수 있다.


얼마전 읽었던 기형도의 시 한편은 어찌 이리도 가슴을 헤집는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본다. 서울에는 안개가 없다.



안개

                                         기형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욱도 이동하지 않
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聖)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똑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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