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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본문

틈/누군가의 한 소절

성석제.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김윤후 2009. 11. 12. 15:40





낙엽이 흔들리는 것에 시선을 두다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낙엽을 쓰고 싶었고 바람을 적고 싶었고 너른 평야와 산과 들, 광대무변한 바다를 옮기고 싶었던 내 글세계에서 나는 갓 태어나 옹알이도 어수룩한 핏덩이였다. 그저 하루를 적어 배설했고 그 내용과 구성의 조악함에 나는 매일을 좌절했다. 내가 본 것들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지, 아니 꼭 말 되어져야 하는데 왜 내 입은 묵언수행 부처처럼 열리지 않는 것인지. 머리가 빠지고 한숨이 깊어지고 발걸음은 무거워만 지는데, 내 머릿속 자판위에 먼지는 쌓여가는데 하릴없이 나는 그저 아득했고 내 풍경은 그저 무심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 동창 두놈과 마주앉은 바람불어 코끝이 찡한 겨울 어느날, 우리는 문을 연지 일주일이 채 안된 술집에서 그집 대표메뉴인 사랑탕을 시켜놓고 소주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어서 나는 끓는 사랑탕에서 의자를 좀 뒤로 빼고 앉아 그 술집의 내벽 인테리어나 전등의 색깔, 아르바이트 생의 미모와 사장님의 열성, 테이블 개수나 다른 손님들의 성비에 대해 골몰하고 있었다. 두어순배 술이 돌고 나도 국물을 두어번 떠 먹었을즈음 한 녀석이 밖으로 전화를 받으러 나갔고 나는 친구들 중 주량이 가장 센 다른 한놈과 잔을 들어 부딪혔다.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꺽으려는 순간 나는 그녀석 뒤에 앉아서 삿대질을 하며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를 보게 되었다. 그녀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발음의 부정확성을 이유로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입모양으로 봐서는 '니가 이러면 안되지'정도로 마주앉은 친구를 구박하는 중인 듯 했다. 얼굴은 이미 한껏 불콰해져 있었고 동행과 잔을 부딪힐때마다 탁자위의 빈병들이 바닥으로 떨어졌으며 빈 술병을 좌우로 흔들며 술 없으니 더 가져오라며 아르바이트 생을 채근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그녀를 좀 더 지켜보면 정말 즐거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이지만 않는다면 내 의자를 그쪽으로 밀고 그녀들 옆에 앉아 토크쇼를 보거나 라디오를 청취하는 사람처럼 그 술자리의 대화와 그녀들의 하는양을 듣고 보고 싶었다. 사람이 아닌 것에 묶여있던 시선이 순간 풀리는 느낌은 무척 짜릿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이 주는 스릴과 그녀들의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려보는 상상은 무척 재미있었다.

하지만 전화를 끝낸 친구녀석이 들어와 앉으면서 내 즐거움은 잠시 멈춰져야만 했다. 내가 그녀들의 현 상황을 호기심어린 말투로 친구들에게 설명하자 녀석들은 잠시 쳐다보더니 '그렇긴 하네'하며 한번 웃고 넘겼다. 어중간한 놈들. 내가 잠시 멍해져 그쪽을 바라보는 것 같으면 녀석들은 술잔을 내쪽으로 들어 내 턱이라도 쳐올릴 기세로 잔을 부딪히길 강요했다. 나는 더이상 그녀들의 술자리를 관찰 할 수 없었고 나는 또 다시 시무룩해져서 바닥의 문양이나 냉장고의 반듯하게 채워 세워진 다양한 종류의 술병들, 메뉴판에 적힌 메뉴들의 추가설명이나 창밖의 잔잔해질 기미가 없는 겨울바람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왜 그녀들을에게서 짜릿함을, 그리고 즐거움을 느꼈던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성석제의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거기에는 그녀들을 바라보는 성석제의 번쩍이는 사유가 있다. 역시 뭐니뭐니해도 사람 다루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유쾌하다. 성석제의 책을 13권 시켰던 며칠 전의 내 선택은 성공적이었던 듯. 당분간은 사람을 보며 지내야 겠다. 당분간은 낙엽이 떨어지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말아야겠다. 낙엽지는 것이 조금 슬프긴 하지만. 그래도.



p.s 결국 그녀들중 내가 유심히 쳐다보았던 한명이 먼저 울음을 터트렸다. 마지막엔 둘 모두 탁자에 얼굴을 쳐박고 잠에 빠졌다. 알바들은 모두 무료한 표정으로 그녀들을 응시했다. 나는 그날 많이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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