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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본문

틈/누군가의 한 소절

성석제.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김윤후 2009. 12. 30. 20:10

 





 할머니는 꽃을 좋아했다. 사랑했다. 지금이야 아무도 살지 않기에 고향집 마당에는 억센 잡초들만 넘쳐나지만 잡초들을 유난히 싫어했던 당신께서 살아계셧을 적엔 마당은 잡초는 커녕 돌멩이하나 없이 깨끗했다. 네모난 마당 네 변에는 꽃을 안은 화분들이 가득했다. 철이 바뀔 때마다 피는 꽃들도 바뀌어 방안에 누워 문을 열면 겨울을 제외하곤 일년 내내 꽃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이름모를 선인장에도 할머니는 꽃을 피워냈고, 여닫을 때마다 삐그덕 거렸던 마당 앞 철문 옆에는 맨드라미가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봉숭아, 채송화가 집으로 들어오는 길 양옆으로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고 텃밭 한 귀퉁이에서는 5월이면 박속처럼 하얀 꽃이 앵두나무 가지끝에 환하게 폈다. 모든 꽃들은 할머니의 손으로 피었다. 할머니는 때가 되면 가지를 쳤고 물을 주었으며 투박한 손으로 시간만 나면 줄기를, 잎을, 꽃을 감싸듯 만졌다. 아침에 네 집을 지나 있던 밭으로 가 종일 밭매고 저녁무렵 돌아올 때면 할머니는 늘 백화(털이 희어 꽃같다 하여 할머니가 이름지은 강아지)의 저녁식사와 당신이 없을 동안 외로웠을 꽃들을 걱정하며 집으로 잰 걸음을 옮기셨다. 할머니의 얼굴에 주름은 깊어졌고 점점 생은 짧아져갔지만 꽃을 향한 할머니의 정성과 사랑은 줄어들 줄 몰랐다. 가끔씩, 할머니의 '우리강아지'였던 나는 할머니가 나보다 꽃을 더 좋아하는 게 아닐까 괜한 심술을 부린적도 있었다. 아버지가 세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가슴에 뭍고 60여년을 살아오신 할머니. 할머니도 그렇게 아름답게 꽃핀 시절이 있었을까. 국민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 손님처럼 명절 때만 고향 내려왔던 손자녀석이 뭣이 좋아 그렇게 나만보면 꽃처럼 웃으셨을까. 고향 그곳에는 꽃이 지고 잡초가 무성하고 사람없이 차가운 대문만 휑뎅그렁하니 남겨졌지만 내 마음 속, 오롯하게 할머니는 늘 꽃처럼 웃고계신다.
 

성석제의 첫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중 '할머니의 뜰'을 읽고 적어본다.


사족.
성석제의 글은 가끔 미친듯이 넘어가는 웃음을 제공한다. 춥고 건조하고 외로운 아침저녁으로 그의 이러한 웃음은 내게 너무나도 달콤하다. 잠시 소개 해본다.


[웃음소리]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에는 웃음소리를 직접 인용한, 형용한 대복이 적다. 특히 진지하고 정통에 가까운 소설일수록 그나마 자주 나오는 것은 미소. 미소짓다, 미소를 흘리다, 미소하다, 소리없이 웃음짓다, 웃음을 머금다, 빙그레 웃음짓다 등으로 아가울 것도 없는 웃음 소리를 아끼고 있다. ······ (중략) 웃음 소리를 찾아보았다. 웃음소리가 가장 많은 책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1_ 숨을 모아 한꺼번에 내보내는 소리에 가장 가까운 ㅎ 자음에 다섯 모음을 결합한 형태. 빈도수가 가장 높다.
 하하, 허허, 헤헤, 호호, 후후, 흐흐, 히히.

······ (중략)

9_ 응용(반드시 따라 읽어야 효과가 있음).

 하헤히호후후히힛헤헤이히히픽아하하하하하하하오호호호호호흐흐흐히힛헤헤헷으흐으으으이와아으이호훗흐헷훗홋핫헐헐헐핫핫피시시

(이 대목에서 자지러짐 ㅋㅋ)


[웃지않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여행객 셋이 밀림을 가다가 식인종을 만나 사로잡힌다. 추장은 관습에 따라 그들을 음식 재료가 되는 형벌에 처한다. 그러나 세 사람 다는 아니고 우선은 한 사람만 잡겠다고 한다. 누가 먼저 솥에 들어가겠는가. 세 사람은 얼굴을 마주본다 서로 고개를 젓는다. 이때 친절한 추장은, 우리 부족에게는 오래된 게임이 있다, 저 밀림에 들어가서 과일을 따서 마을 가운데 있는 큰키나무 아래로 가져오라, 그것을 가지고 선착순으로 솥에 들어가는 순서를 정하겠다고 제안한다. 세 사람은 말세에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추장의 신호에 따라 밀림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각자 과일을 구해 전속력으로 달려온다.

 첫번째 사람은 자두를 따가지고 온다. 이때 추장이 험악한 얼굴로 나무에 오르라, 뛰어내려서 그것을 항문 안으로 집어넣어라, 그렇지 않으면 펄펄 끓는 물에 일등으로 집어넣겠다고 외친다. 첫번째 사람, 나무에 기어올라가서 바지를 벗은 다음 죽을힘을 다해 뛰어내린다. 결국 성공한다. 그사이 나무아래에 와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두번째 사람은 걱정에 휩싸인다. 그는 참외를 들고왔던 것이다. 과연 그걸 집어넣을 수 있을까. 하필이면 참외를 들고 왔을까, 대추도 있는데. 참외는 잘 깨지고 무엇보다 지긋지긋하게 크다. 그는 스스로의 불운을 한탄하며 나무에 오른다. 그리고 바지를 벗고 뛰어내리려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웃기 시작하더니 나무 밑으로 떨어져서 죽고 만다. 그가 본 것은 멀리서 세번째 사람이 수박을 양 옆구리에 기고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는 광경이었다.

 절에 있는 화장실을 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 화장실은 대부분 구덩이를 대단히 넓게 판다. 그래서 용변을 볼 때면 다른 재래식 화장실과는 달리 튀어오르는 반작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래쪽에서 투어오르는 물질을 피해 쭈그리고 앉은 채로 이리저리 엉덩이를 휘두르는 일은 우습다.
 어떤 사람이 절에 있는 화장실을 쓰기 위해 밤에 숙소에서 나온다. 산중이라 아주 어둡고 고요하다. 그는 조심조심 화장실로 발을 옮긴다. 멀리서 부엉이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래도 두려움을 이기고 치러야 할 일이 있다. 그는 문 앞에서서 어둠 속을 다시 돌아본다 그리고 문을 열려다 도시에서 온 배운 사람답게, 예절바르게, 습관에 따라 화장실 문을 똑똑, 두드린다. 그의 예상대로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다. 그는 습관의 힘은 무서운 거라고 두려운 가운데서도 우스워하면서 문을 열려고 한다. 그순간 똑똑, 하고 사람이 있다는 표시의 음향이 들린다. 그는 귀를 의심한다. 이 야밤에, 이 산중에서 노크소리를 듣다니. 그래서 다시 똑똑, 하고 침착하게 두드려본다. 역시 아무 기척이 없다. 그는 역시 잘못 들었지 하면서 문을 열려고 한다. 그 순간 다시 반응이 온다. 똑똑, 소리가 나는 것이다. 그는 공포에 휩싸인다. 어둠 속에서 거울을 마주보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볼일은 뒷전이다. 공포가 그의 손을 들어 다시 똑똑똑, 두드리게 한다. 이번에도 아무 기척이 없다. 그는 문을 열려고 문고리에 손을 댄다. 그 순간 다시 그가 두드린것만큼이나 다급한 응답이 들린다. 똑똑똑! 그는 광란 상태에 빠진다. 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똑또독, 두드린다. 그때 문이 활짝 열리고 안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뛰어나와 그의 뺨을 불이 번쩍 나도록 올려친다. 얀마, 어디서 장난을 치고있어! 그는 눈앞에 반짝이는 별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절의 화장실은 다른 화장실보다 넓어서 노크에 응답하려면 바지춤을 찹은 채 문간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 돌아가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다시 나오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돌아가는 데 시간이 든다. 다시 나오는 데 시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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