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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원. 보통의 존재. 본문

틈/누군가의 한 소절

이석원. 보통의 존재.

김윤후 2010. 5. 4. 13:35





현장 고발 치터스





 외국의 방송 프로그램 중에 <현장 고발 치터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내용인즉 부부나 연인 중 한 사람이 상대방의 불륜을 의심해 의뢰를 하면 제작진은 거의 사설탐정과도 같은 집요함으로 파트너의 불륜 행각을 쫓고, 마침내 적발이 되면 증거 화면 등을 의뢰인에게 보여주며 확인을 시킨 후 함께 불륜 현장에 나타나 파트너를 엿 먹이는 뭐 그런 프로그램이다. 물론 엿을 먹는 게 파트너만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사실 이 프로그램을 처음 봤을 땐 내용이 워낙 쇼팅해서 몇 번 챙겨 보다가 만날 똑같은 타령뿐이라 언젠가부터 보지 않았는데 어제 등장인물들이 다소 독특해서 채널을 고정하게 되었다. 의뢰인은 50대 중후반쯤 돼 보이는 흑인 노인네로 다리를 절었고 아마도 일용직 노동자인 듯 싶었다. 그리고 그가 힘들게 일하며 돌봐온 그의 여인은… 예뻤지만 눈이 사시인 여자였다. 둘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양쪽 다 핸디캡이 있는 처지였으므로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며 커플이 되었음은 짐작해볼 수 있는 스토리였다.

 제작진은 추적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륜은 사실로 밝혀졌다. 며칠 후, 여느 때처럼 여자가 자신의 집으로 외간남자를 끌어들여 욕정을 불사르려는 찰나 <현장 고발 치터스>의 제작진과 의뢰인이 들이닥쳤다. 이때가 프로의 가장 극적인 지점이자 시청자들로서는 가장 자극적인 장면을 보게 되는 순간이다. 한 침대에 위엉켜 있던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남자는 황급히 달아나고 여자는 망연자실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떠들썩한 상황도 잠시, 카메라가 돌아가고 조명이 대낮처럼 환히 빛나는 방 안에서 두 연인은 마주 앉았다. 남자는 상처받았으되 무기력하게 슬퍼하고 여자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괴로워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하고 살을 섞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러나 내가 정말 슬펐던 건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럴 수 있냐고 다그치는 진행자에게 던지는 그 여자의 한마디였다. 




 "자기가 채워줄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말할 수가 없었어요…"




 아아… 이 하찮고 천박한, 진짜 고발 같지도 않은 고발 프로그램에서 이토록 아득한 슬픔을 느끼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석원.<보통의 존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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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창한 오후, 어느 조용한 찻집에 들어가 의자에 앉은 그녀는 내게 아무말도 하지 않고 마냥 울기만 했다. 나는 왜 우냐고 묻지 못했고 우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말없이 키스를 해주었다. 내 볼에도 눈물이  흘렀지만 그게 내 눈물이었는지 그녀의 눈물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주문한 차가 나왔지만 격정적인 감정을 토한 뒤에 그녀는 아무 말도,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 채 내 왼쪽 어깨에 기대어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삼십 분을 그렇게 외딴섬의 조난자들처럼 멍하니 앉아있다가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 헤어질까?"


 그리고 다시 십 분 뒤,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그녀에게서 헤어짐의 이유를 듣지 못했다.
 혹시. 그런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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