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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퀴즈쇼 2 본문

틈/누군가의 한 소절

김영하. 퀴즈쇼 2

김윤후 2010. 5. 11. 18:53





모아둔 그의 문장들이 아쉬워 두 번째 쓰는.

그는 정의 내리기 좋아하는 소설가.
역시 뛰어난 관찰력이 필요해.






1.
"기회는 선한 음식 같은 거야. 냉장고에 넣어두면 맛이 떨어져. 젊은이에게 제일 나쁜 건 아예 판단을 내리지 않는 거야. 차라리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게 더 나아. 잘못된 판단을 내릴 까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 이게 제일 나빠. 이렇게 귀신만 득실거리는 집에 웅크리고 있어봐야 뭐 하겠나? 아마 인숙이가 가고 나서 지금껏 제대로 먹지도 않고 뭐 하나 번득하게 한 일도 없을 거야. 안그래?"



2.
 군대에서 제대하고 사회로 돌아왔을 때, 가장 피곤했던 것은 선택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군대는 식단이 하나였다. 식판을 들고 줄을 서 있으면 차례대로 밥과 반찬을 준다. 하루의 일과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육군본부와 사단 같은, 나로서는 감도 오지 않는 높은 곳에서 정한다. 아무것도 선택할 필요가 없다. 군대에서는 아무도 "이일병, 너라면 이 두 가지 일 중에서 뭘 할래? 골라봐" 같은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냥 정해진 일을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회로 돌아오자 세상은 선택할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딜 좀 가려고 해도 먼저 버스냐 지하철이냐를 결정해야 했다. 배스킨라빈스든 스타벅스든 계산대 앞에서는 늘 뭔가를 골라야 한다. 부라보콘이냐 월드콘이냐만 결정하면 됐던 시절은 가버린 것이다. 마술사들은 앞에 있는 관객에게 카드를 고르게 함으로써 속임수를 감춘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결과에 대해서는 쉽게 믿어버리고 심지어 책임까지 지려고 하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인간은 늘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자신에게 속는 것이다. 



3.
 "내 친구, 정아 알지? 걔가 책을 하나 보고 있길래 뭔가 하고 봤더니, 제목이 '왜 잘난 여성들은 한심한 남자한테 끌리는가?' 야. 그 책에 보면 여성이 제일 경계해야 되는 게 바로 동정심이래. 이 죽일 놈의 동정심! 바로 그것 때문에 똑똑하고 예쁜 여자들이 별볼일 없는 남자한테 엮여서 고생한다는 거지. 오빠는 모성애를 자극하는 스타일이야. 좀 안됐잖아. 뭐 하나 제대로 하는 일도 없고, 늘 이거 하겠다 저거 하겠다 말만 하고, 툭하면 징징거리면서 세상을 원망하고, 엄마는 비둘기가 됐네 어쩌네 하구말야.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 오빠가 하도 궁금해하길래 얘기해주는 거니까."



4.
 세상에는 되물을 것들투성이었다. 어떤 세계에 들어가 그 일원이 된다는 것은 곧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게 된다는 뜻이었고, 무슨 말을 들어도 다시 되묻지 않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체로는 몰라서 되묻지만 알면서 되물을 때도 있다. 그것은 힘없는 어린 남자가 세상에 맞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보타주였다.



5.
…… 그 무렵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유통기한이 지난 '바나나맛 우유'와 '천하장사' 소시지를 먹고 <무한도전> 재방송을 보며 낄낄대는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6.
 "필리핀 바닷가에 가면 어부들이 해먹에서 낮잠을 자고 있어. 왜 하루종일 낮잠만 자냐고 물어보면 어부가 되물어. 그럼 낮잠 안 자고 뭘 합니까? 이 사람들아, 나가서 물고기도 잡고 돈도 벌고 그래야지. 그럼 어부가 또 물어. 고기 잡고 돈 벌어서요? 좋은 집도 짓고 애들도 교육시키고 그리고 편안히 쉬어야지. 그럼 어무가 웃으면서 뭐라는지 알아? 지금 쉬고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니까 할말 없더라구. 참 팔자 편한 놈들이야. 가난하게 사는 덴 다 이유가 있어. 안그래?"



7.
…… 아니다. 바로 그 정신, '그깟 사만원 때문에'라고 말하는 바로 그 정신 때문에 나는 세상에 속아넘어가는 것이다. 다른 자들의 밥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 사만원 때문에 해도 뜨기 전에 가게에 나와 알바를 족치는데, 오직 나만이, 이 한심한 이민수만이 '그깟 사만원 때문에'라고 태연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정신이 나로 하여금, 만원만 더 달라는 사기꾼에게 내 돈도 아닌 남의 돈을 이만원이나 선뜻 내준 것이다. 방값 이십구만원짜리 고시원에 살면서, 천원짜리 컵라면에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이나 먹는 주제에 말이다.



8.
…… 도시에서는 고통도 뱃살처럼 감추고 관리해야 한다. 고통을 드러내는 것은 뱃살을 내놓고 다니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이다. 



9.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꺼냈다. 내가 낼게.
 가난한 사람은 이렇게 해서 좀더 가난해진다. 그들은 가난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결국 더 가난해진다. 가난을 숨기기 위해 '남들 다 하는 것'을 하고 그 '남들 다 하는 것' 때문에 빚을 지고 그 빚을 갚느라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 



10.
 이디스 워튼이라는 미국 여성작가, 혹시 알아? …… 맞아. 『순수의 시대』쓴 사람. 그 사람의 소설에 이런 말이 나와.
 "여자라는 존재는 방으로 가득한 저택 같은 거예요. 거기에는 사람들이 오가는 복도가 있고 손님을 접대하는 응접실도 있고 가족들이 함께하는 거실도 있지요. 그러나 그것들 너머에는 전혀 다른 방들이 있답니다. 누구도 문고리조차 잡아보지 않은, 아예 그런 방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안다 해도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모르는 방들, 그리고 그 방들 중에서도 가장 깊은 방, 신성하고 신성한 그곳에 영혼이 홀로 앉아 끝내 오지 않을 어떤 발자국을 기다리는 것, 그게 바로 여자의 본성이에요."



11.
 언젠가 한결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야. 안 그래? 거의 모두 대학을 나왔고 토익점수는 세계 최고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액션영화 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 타는 우습고 평균 신장도 크지.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맞아, 너도 피아노 치지 않아? 독서량도 우리 윗세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아. 우리 부모세대는 그중에서 단 하나만 잘해도, 아니 비슷하게 하기만 해도 평생을 먹고살 수 있었어.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잘못한 게 없지."
 나도 맞장구를 쳤다.



12.
 "말해본 적은 있어?"
 "뭐?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
 "응, 입 밖에 내서 말해본 적 있냐구. 한 번이라도."
 "음…… 있는 것 같은데."
 거짓말이었다.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황당한 소망들을 늘어놓으며 그 순간을 모면해왔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충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렇다. 사람들은 남에게 별 관심이 없다. 그냥 할말이 없으니 그런 뻔한 질문들을 던질 뿐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취직했냐, 결혼 안하느냐 묻는 것도, 사실은 아무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13.
 사랑하는 사람의 방에 들어가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아무리 대단한 영화도, 그 어떤 기상천외한 롤러코스터도 그것에 필적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를테면 거기에는 냄새가 있고 아주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역사가 있다. 무엇보다 그 방은 삼차원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나는 뚜벅뚜벅 그 안으로 들어가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물건들은 만져볼 수 있으며 작은 것이라면 슬쩍 가져갈 수도 있다. 천장은 그녀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처음으로 보는 바로 그 천장이며 침대는 그녀가 자신의 온몸을 스스럼없이 던지는 바로 그 침대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방에서 우리는 얼마간 탐정이고, 또 얼마간은 변태이며, 그리고 또 얼마간은 수집가다. 방은 그녀에 대해 말해주는 단서들로 가득하며 그것들은 나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단서들은 하나같이 매혹적이다. 인기가수의 팬들이 아수라장을 틈타 그의 땀이 묻은 선글라스를 낚아채듯 나 역시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손댄 그 어떤 것을 내 소유로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14.
 나는 예전부터 육교가 참 좋았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횡단보도가 좋겠지만 횡단보도에는 육교와 같은 전망이 없다. 육교에서 내려다볼 때면 도시는 훨씬 아름답고 먼진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횡단보도는 서둘러 건너가야 할 곳이지만 육교는 그렇지 않다. 건너지 않고 오래 머물러도 뭐라는 사람이 없다. 길의 한가운데에서 오가는 차를 마음껏 내려다볼 수 있는 경험은 이제 귀해졌다. 육교들은 공룡의 운명을 따라 멸종해가고 있다. 횡단보도는 그것대로 만들되 육교는 육교대로 내버려두면 안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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