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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머저리 클럽. 본문

틈/누군가의 한 소절

최인호. 머저리 클럽.

김윤후 2010. 5. 13. 15:55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말이 남녀공학이었지 층 별로 남녀를 갈라놓은 남고 와 여고의 분단체제나 다름없는 학교였다. 가까이 있지만 갈 수 없는 금남의 공간을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우리 혈기왕성한 남학생들은 여학생들과 관련된 일이라면 사족을 못쓰고 덤벼들었다. 여학생 층이었던 3층을 가로질러야만 갈 수 있었던 정보산업 실기시간에 우리는 단체로 열을 맞춰 이동했지만 눈은 여학생들의 반을 기웃거리며 그녀들의 삶을 단박에 훑어내고자 필살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여학생들 중 누구의 얼굴이 예쁘며 누구의 가슴이 제일 크고 누구의 다리가 쭉쭉 잘 빠졌는지 야자 쉬는 시간마다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 킬킬댔다. 그러다가 학교 밖, 그러니까 동네 친구라던지 초등학교 동창이라던지, 교회에서 가깝게 지낸다던지 하는 이유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여학생을 아는 녀석이라도 나오면 마치 의자왕이라도 현현한 듯 녀석을 부러워하며 질문 공세를 퍼붓고는 했다.


 당시 나는 머저리 쑥맥이었고 몸무게는 54kg에 코 옆의 점이나 다리의 아마존 밀림을 연상케 하는 털들, 거뭇거뭇한 수염과 곱슬머리카락 같은 컴플렉스들이 집합된 루저덩어리였다. 나는 늘 친구들의 여자이야기에 끼지 못했고 몇 자리 앞에서 공부하는 척 앞만 보며 녀석들의 재미난 이야기를 엿들어야 했다. 물론 자존심의 문제도 있었고. 그러다가 방과 후 다니던 수학 보습학원에서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한 여학생과 친해지게 되었는데 이게 사단의 시작이었다. 매일 학원 수업 후 그 여학생의 집과 우리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바래다 주던 일이 쌓여 친해지게 되었던 것인데 그 여학생이 당시 내 반 담임선생님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던 것이었다. 쉬는 시간 중간중간 반 친구들의 입에서 그 여학생의 이름이 나오게 되고 슬쩍 내가 그녀를 알고 있다고 얘기하는 바람에 나는 순식간에 대화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그 후 무차별 질문공세에 나는 머리가 지끈거려오곤 했다. 나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기에 모른다고만 대답했고 친구들은 그럴수록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훑곤 했다.

 그러기를 며칠, 어느날 담임 선생님께서 문학시간에 내 옆으로 오시더니 뜬금없이 큰소리로 내게 물으셨다.

"니가 J랑 K랑 친하다매? J가 너좀 잘 봐달라고 그러더라. 너 걔랑 사귀냐?"

 아뿔싸.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완전 대박! 나는 갑작스런 담임선생님의 질문에 예? 에? 거리다 답을 하지 못하였고 그 순간 아이들은 매의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때 수업을 끝내는 종이 울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분명 몸 어딘가가 뚫어졌을 것이다. 수업 종이 울리고 나서 내 주변으로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들이 몰려들었다. 이야기의 중심은 J양이 아니라 K양이었다. J양은 앞서 말한 학원에서 친해진 그 여학생이었지만 나는 K양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사실 전혀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J를 집에 바래다 주다가 집앞에서 J의 친구를 두어번 보고 인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이 K양인지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K양은 새침하고 귀여운 얼굴과 고등학생답지 않은 그 때 유행하던 말로 쌔끈(?)한 몸매를 지닌 학교 퀸카 넘버 원으로 군림하던 여학생이었다. 그런 여학생과 내가 알고 지낸다니. 성난 들소처럼 친구들은 내 앞에서 난동을 부렸고 전화번호는 땄냐, 말은 섞어 보았냐, 정말로 그렇게 예쁘냐, 가슴은 좀 크더냐 등등 나는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 들에 점점 파묻혀 갔다. 그 이후로 나는 반에서 여자 많이 아는 놈, 뒤에서 몰래 호박씨 까는 놈, 알고보니 난봉꾼 등으로 몰려 선망과 질시를 동시에 받아야 했다. 그날 저녁 학원 수업 후 J를 바래다 주면서 얘기를 들어보니 J가 내 반 담임선생님과 오래 말을 섞고 싶은 마음에 대화 도중 나를 들먹였고 이미 유명해진 K양 까지 같다 붙이면서 일이 시작된 것이었는데 그녀는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며 킥킥거리며 웃어대기만 했다. 졸지에 난봉꾼이라니. 에휴.

 그 이후에도 그녀들과의 스토리는 많지만 생각하고 옮겨 적으려니 조금 쑥쓰럽다. 웃음도 나고. 그 때는 왜 그렇게 여학생 옆에만 가도 지진이 난 것처럼 발이 후들거리고 입은 마르고 말은 더듬거렸는지. 마치 최인호의 『머저리 클럽』의 머저리들 처럼 말이지.






최인호 『머저리 클럽』
성장소설은 역시 나를 즐겁게 한다. 얼마간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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