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틈/사소한 것들 (41)
서울남편광주아빠
그녀석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다. 뚱뚱한 녀석. 키는 나보다 조금 작고 얼굴은 한가위 보름달처럼 둥근 녀석. 고기반찬을 좋아하고 축구로 다져진 종아리 근육이 멋진 녀석. 그리고 또. 많은 사랑에 아파하고 친구들에게, 특히 내게는 더욱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기 싫어 사라지기 전 나를 멀리하려했던 녀석. 그녀석은 몇 년 전 이제는 그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날에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Alcoholers. 그래 알콜러스 얘기를 빠트리면 안되겠지. 최인호의 성장소설에 나오는 [머저리 클럽]의 녀석들처럼 우리 알콜러스들도 때만 되면 서로를 찾아 재미난 일거리들을 만들어내는 놈들이었다. 개그맨보다 더 웃기던 명호, 잘생긴 외모에 훤칠한 키와 뭐든 모아두는 경훈이, 합기도 유단자 합맨 성수, 술 잘 마시고 앳된 외모..
밝은 사람은 자신이 밝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 이건 어른이나 젊은이나 아이나 모두 같다. 태생적으로 밝게 태어난 사람은 똑같이 밝지 못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안다. 웃음이 울음과 같다는 것을 안다. 매일 웃고 살지만 매일 울고 있다는 것을 안다. 밝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의 가슴에 따뜻한 꽃 한송이쯤 자라고 있다는 것을 밝은 사람은 안다. 슬픔이 스며 몸이 젖은 사람의 시선 속에 잘 차려진 밥상 하나 놓여져 있다는 것을 안다. 밝은 사람이 밝지 못한 것처럼 밝지 못한 사람이 밝다는 것을 안다. 울음 뒤에 웃음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밝은 사람은 안다. 나는 울면 안되었으나 늘 울었다. 보이지 않게 울었지만 울음은 늘 어떤 것 보다도 잘 보였다. 혼자 있을 때면 늘 울음은 찾아왔고 함께 일때면 늘 웃음이..
집으로 돌아와 늘 그랬던 것 처럼 바지를 벗고 빤쓰만 입고서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비 갠 뒤라 날씨는 맑았고 볕은 따뜻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져 있는 내용물이 아무것도 없을 게 분명한 냄비가 눈에 들어온다. 거실에는 엄마가 해오던 부업 일감들이 난수처럼 어질러져있고 그리고 천정. 천정에는 날지 못하는 돌고래 한마리가 며칠째 그 자리에 떠있다. 코를 천정쪽으로 세우고 꼬리는 쇼파쪽으로 내린 파란 돌고래. 얼마전 조카와 나들이 갔던 어린이대공원에서 조카 손에 쥐어준 오천원짜리 돌고래. 녀석은 아직 죽지않고 살아있다. 하지만 지금 자세히 보니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새 공기들이 몸에서 많이 빠져나간 듯 꼬리부터 배 밑까지 쭈글쭈글 주름이 잡혀 있다. 날지못하는 돌고래..
빈방이 하나 있다. 다섯 식구 사는 집에, 그것도 가장 넓은 큰방이 사람하나 들이지 않은채 비어있다. 비우고 싶었던 것 도 아니었고 원래 비워져 있던 것 도 아닌데 그 방은 그렇게 비어있다. 그방의 주인은 진짜 우리 아빠였을까. 그 방의 주인은 그 방에서 한번도 주인행세하지 못했다. 늘 천정만 보고 있었고 빛을 보려고 혼자서 일어나 커튼을 치지도 못했다. 독립난방이 되는 요즈음, 따뜻한 거실과는 달리 그 방에는 온기하나 없다. 꽃피는 춘삼월이라지만 갑작스럽게 내린 눈이 발목까지 쌓이는 추위 속에서 그 방은 창문을 닫아놓아도 열린것 처럼 추웠다. 아버지는 그 가운데서 2년을 누워계셨다. 진정 아빠가 그 방의 주인이었을까. 술에 절어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방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무릎을 꿇고 아빠가 계셨던..
혼자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혼자 있음을 즐기고 혼자 밥먹고 혼자 영화보고 혼자 길거리를 걸어가는 시간시간을 혼자 향유하고 다른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고 있다고 말하겠지만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나면서 죽을 때까지 기억나지 않는 누구와 본적없는 풍경과 쉬지않은 공기와 맡지 않은 향기들을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혼자 있을 때 누구에게라도 섬광처럼 외로움이 찾아오는 것도 기다림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기다림은 늘 외로움을 달고 온다. 해가 사라진 자리에 노을이 자리잡고 나면 나는 늘 철봉에서 내려와 집으로 달려갔다. 학교에서 집까지 향한 길은 갈래길 없는 외길이었다. 길 양 옆으로 누런 벼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가을빛들을 뿌려댈 때 나는 참을 수 없는 기다..
오늘 부산의 낮 기온이 2월 하순 기온관측사상 처음으로 20도를 넘어섰습니다. 오늘 낮은 전국 곳곳에 이상고온현상이 나타났는데요. 서울역시 관측사상 처음으로 2월 하순 기온이 15도를 넘어서는 등 초여름 날씨처럼 후텁지근한 햇볕으로 시민들은 더위를 느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상고온현상은 내일 서울을 포함 전국적으로 비가 내리면서 한 풀 꺾이겠습니다. 자세한 날씨소식에 OOO기잡니다. 이상한 꿈에서 깬 후 나는 0.5초도 되지 않아 정신이 말짱해졌다. 이상한 꿈이었다. 누군가가 코풀듯 신춘문예에 당선되버리고는 살짝 올린 입꼬리로 내 앞에서 그 사실을 토해내는 장면이 꿈을 깨고나서도 환영처럼 천정에 펼쳐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급한 마음에 꿈을 잇고 싶어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정확히 1분 뒤 몇발자국..
매일 울고 매번 웃는 시간들 속에서 감정이 점점 소진되고 있다. 오랜만에 상경한 대학 동기녀석은 그의 팔짱을 낀 폴랑거리는 여자친구를 달고 나타났다. 실실대지는 않았지만 그간의 연애가 녀석에게 좋은 인상으로 남았던지 전체적으로 편안한 모습이었다. 날은 맑아 하늘에 구름한점 없었으며, 시원한 바람 속에 검은 하늘을 올려다 봤을 때 유난히 별이 잘 보이는 저녁이었다. 한참동안 자리에 서서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내곁으로 그녀석이 다가왔다. 녀석의 여자친구와. "뭐해?" "그냥." 술을 마셨다. 간만에 들른 휘모리에서 늘 마셨던 사과소주와 늘 먹었던 모듬꼬치를 시켜놓고 녀석과 녀석의 여자친구와 마주앉아 그간 녀석의 연애담과 앞으로의 계획과 서울로 올라온 오늘 하루동안의 이러저러한 일들을 들으며..
(내가 일하는 훼미리마트 더 까페) 찾아가지 않는 픽업배송물이 하나 있다. 주문일자는 지금으로부터 2년전인 2008년 여름의 어느날. 나는 잠시 그 때 내가 무슨일을 하고 있었나 생각해보다 손님을 맞는다. 픽업배송물을 담은 탑차가 올 때마다 나는 서랍장에서 그 물건을 꺼내 요리조리 살펴보곤 했다. 2년전 여름 어느날 누군가에게 배송되었어야 했을 주인없는 배송물. 내용물을 궁금해하며 아르바이트 생들끼리 배송물의 주인과 찾아가지 않는 사연에 대해 얘기해보는 일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그 배송물은 내 기억에서 조금씩 잊혀졌고 나는 평소처럼 라떼킴이 되어 커피머신에 커피빈을 넣으며 바리스타를 흉내내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시간에 밀려 사라진 기억들. 내 일상에서 그 물건..
모든 사물은 상처다. 칠이 많이 벗겨진 개다리 소반, 이광기가 아들의 죽음을 기억하며 울고 있는 저 텔레비전, 회사를 퇴사하면서 구입한 엠피쓰리, 드럽게 새로 사고싶은 핸드폰, 상경하면서부터 우리 집 벽에서 재깍거리는 시계. 모든 게 전부 상처다. 아프고 쓰리고 눈물나고 아리고 모질다. 몇 해 살지 않았지만 내 인생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졌을 그 모든 사물이여. 그 때의 내 시간을 채워주었던 모든 이들이여. 사랑이여. 함께 했던 모든 사물들에 내려 앉아 있을 추억들이 모두 상처다. 나는 라면 냄비를 보면 제대 후 복학생으로 살았던 2005년 겨울이 생각난다. 내겐 같이 교정을 거닐 동기가 없었고 함께 추위를 이겨낼 여우목도리가 없었고 늦은 밤 밥상에 밥공기 같이 올릴 친구가 없었다. 북적거리는 24시간 식당..
늦은 밤, 달그닥 거리는 소리를 품은 거실 한쪽 구석에서 라면을 끓인다. 물이 끓으려 할 때쯤, 미리 썰어서 얼려놓은 청양고추 조금과 만두, 그리고 라면 스프와 야채가루를 넣는다. 물이 끓으면 라면을 넣고 더 팔팔 끓인다. 반찬은 총각김치. 시간은 12시를 넘고 있고 세상은 조용하다. 아버지 오줌통 한번 비워 드리고 잡은 젓가락. 김이 모락모락 어둠을 가르고 총각김치 한 입 베어물고 살짝 느낀 오한에 몸서리 친다. 바깥은 춥다. 담배연기처럼 나오는 입김을 뿜으며 오그라드는 몸뚱아리를 간신히 집 안으로 밀어넣으면서, 삶은 고단하고 처절했다. 버스에는 사람들이 그득했고 졸립고 멍한 삶의 단락들은 그 속에서 비벼져 버스는 복작스러웠다. 내 라면은 꿀떡꿀떡 잘도 목구멍을 타내려갔고 국물은 위장 한 가운데서 찰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