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틈/사소한 것들 (41)
서울남편광주아빠
아빠가 만날 미안해. 삼시 세끼 밥을 위장으로 넘기는데 없어서는 안될 것이 밥이나 반찬이나 국물이나 물이나 또는 숟가락, 젓가락인 줄 알고 있던 나는 입 속의 흰 옥수수들에 무감했다. 내가 맛있게 파김치를 밥 가득 뜬 숟가락 위로 얹고, 김이 몽글몽글 오르는 라면 한 젓가락을 들어 호호 불어재끼며, 이것저것 남은 반찬들을 큰 대접에 섞고 고추장 한 숟가락 퍼 넣고 오른손 왼손으로 비빌 때 우리 아버지는 바닥에 누워 간이 소변통 뚜껑을 열고 신음하며 오줌을 누었다. 오줌 색은 술을 들이부어 썩을대로 썩어버린 위장을 부여잡고 이른아침 변기 앞에서 토해내는 신물처럼 노랗고 냄새는 지독히도 독했다. 이동식 소변통은 며칠만 세척하지 않아도 오줌 때가 더께처럼 통 바닥에 자리잡아 방 전체를 집어삼킬 듯 공기를 어지..
* 1 * H가 형의 전화를 받고 모텔을 빠져나와 집으로 달려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이미 상황은 휴전기로 돌입하고 있었다. 그의 형은 자기 방에서 사태를 방관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고 그의 작은누나는 H와 그의 형과 그의 누나 모두를 잉태했던 그들의 엄마의 머리채를 한움큼 쥐어잡고 씩씩 대며 무슨 말인가를 해대고 있었다. H의 엄마는 입 근처가 심하게 긁힌 듯 베어나온 피가 번져 입이 귀까지 찢어져 마스크를 하고 다닌 다는 홍콩처녀귀신이 마스크를 벗은 것 처럼 괴기스럽게 머리채를 붙잡힌 채 정신없이 떨고있었다. 그녀의 동공은 이미 반쯤 풀려있었고 응수하지 못하고 이내 허공에서 가로저어지는 팔을 어깨에 매단 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H가 전화로 작은누나와 엄마가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잠이 오지 않아 며칠 전 사두었던 도종환 시인의 시집을 펼쳐들었다.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을 읽고 나서 왠지 시집으로는 졸음을 불러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번 째 시를 읽으면서 나는 이미 시를 분석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시 속에서 내게로 던져지는 의미들에 대해 허공에 잡념을 섞어 스케치하고 있었기에 나는 '탁' 소리와 함께 시집을 접어 책상 위로 던져버렸다. 도종환 시인에게 별로 미안하지는 않았다. 습기가 없이 건조한 공기 속에 답답한 감이 없지 않아 나는 창문을 열었다. 11월의 차가운 겨울 바람이 거리를 두고 멀리서 다가와 다시 멀리로 불려가길 반복 하면서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니, 청명한 공기 속에서 다시 희미하게라도 남아있는 잠이 달아나버린다면 다신 꿈 속으로 들어갈 ..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의 아침, 오후, 저녁은 그저 듣거나 보거나 하는 일들이 속을 채운다. 그저 일어나 이불을 개고 샤워를 하고 팬티를 갈아입고 인터넷을 한번 항해하고 집을 나와 버스를 탄다. 학교에 도착해서 후배를 만나고 밥을 먹고 시체처럼 팔, 다리, 허리가 잘려나간 은행나무 무덤앞 동네커피숍에서 핫초코를 주문해 마신다. 돌아와 책을 읽고 잠에 빠지며 일어나 다시 책을 보고 글을 써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의 일상은 무료하고 공허하고 고독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내가 나를 버리고 있다는 생각을 잊으려 노력한다. 오늘도 나는 나를 몇번이나 진창에 처박았나. 무능력한 나를, 지루한 나를, 쓸데없이 생각만 많은 나를. 하지만 처박아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저승사자처럼 걸어오는 나. 나는 결국 버려진 ..
헛구역질을 하면서 드는 생각은 내가 병에 걸렸나, 도 아니고 임신인가, 도 아니다. 개워낼 생각들이 뭉쳐있는 위장에 빨리 허기를 채워야 겠다, 라는 생각이 정답이다. 쑤시는 어깨와 저린 팔, 가뿐 호흡, 묵직해져 쑤셔오는 오른쪽 발바닥을 이끌고 도서관 문을 열며 불이 꺼져있는 도서관은 도서관 같이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헛구역질. 양 어깨를 드러내놓고 꽉 끼는 원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를 몇 보 뒤에서 바라보며 뛰어가 저 여자를 덮쳐버릴까, 생각했다. 그리고 또 헛구역질. 시내의 꺼져버린 가로등과 죽기살기로 바람을 가르는 자동차들, 연신 수군대는 가로수 은행나무 사이를 걸으며 도로로 뛰어들면 어떨지 생각했다. 격한 헛구역질. 소리없는 눈물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너를 위한 발걸음에 싼 값을 지불하마. ..
그 남자는 끈질기게 자신이 지금 어디있는지 물었다. 내 멱살을 잡고 쥐고있는 손아귀의 힘을 더하면서도 그 남자는 끈질기게 지금 자신이 어디 있는 거냐고 외치듯 비명지르듯 따져 물었다. 세차게 비가 내리는 간이역에서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그와 나 둘이 배경을 지키고 있었다. 세계의 어딘가에서 툭 하고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느낌의 이 남자는 도대체 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내게 자신의 현재를 물어오고 있는 것일까. 가을 비는 내리치는 속력을 더해가고 나는 심한 오한기에 몸을 떨었다. 주위에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철로 곁에서 비맞으며 울고 있는 강아지풀과 역 담장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 덩쿨들, 그 사이사이 매달려 떨어질 기미로 벽을 붙잡고 있는 조롱박들이 을씨년스럽게 시야에 들어왔다. 당황스..
내 삶의 그림을 그려보자면 자.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익숙해진 고통의 무게가 키큰 담벼락으로 서있는, 막다른 골목마다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비춰주는 거울이 걸려있고, 믿을 것이라고는 몸뚱아리밖에 없는 현실에 비상구는 존재하지 않는 미로가 아닐까. 울고 싶을 때 눈물이 나지 않는 상황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함이 미로 속에 가득차있는 내 삶은 지금 막장일까. 늘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던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고, 명문대를 졸업했으며, 교우관계가 원만하고 즐거움이 많아 늘 웃음이 얼굴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 평범한, 둥글게 살아가는 나는 지금 내 안에 없다. 나는 나를 잃어버렸고 찾을 기력을 소실했으며 그 자리에 멈춰서버렸다. 그저 걷고 읽고 먹고 싸며 웃기만 하면 살아가는 것인줄로만 착각했던..
사람들은 내가 부럽다고 했다. 내가 그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전화를 받아 그들의 안부를 듣고 내 일상을 전할 때 그들은 내가 부럽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그들이 전혀 나를 부러워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당신들이 더 부럽다며 겸손을 부렸다. 일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을 부러워 한다는 사실이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몰랐던 사실이기에 나는 그들의 전화를 받아 아무 부러울 것없는 내 삶을 추종하는 인사치레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최근 전화를 하거나 받는 일을 줄였다. 기실은 내가 전화를 하는 것을 줄였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들은 내게 전화를 그다지 많이 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잠시 핸드폰을 머물렀던 자리에 두고 장소를 옮겼다 되돌아 왔을 때마다 나는 ..
무너져 내린 하늘 구멍으로 연일 비가 쏟아진다. 비의 줄기로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물 흘러가는 소리로 비가 내리고 사람들은 모두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글을 쓰고 있는 여기서 밖을 봐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어딜 바삐 뛰어가는 지 작은 우산이 어울리지 않는 덩치 큰 사내가 내 시야를 가로질러 간다. 나는 책상으로 의자를 당겨 컴퓨터를 켰고 또 이렇게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어제는 엉망진창이었다. 그래도 분위기는 꽤 좋았다. 비가 내리는 날의 나는 기분이 좋았던가. 어느날엔가 비 냄새가 진해 그것에 대해 썼던 기억이 난다. 봄여름가을겨울의 비 냄새. 향기라기보다 냄새라는 말이 적절했던. 바닥부터 들끓던 그 솟아오름이 좋아 나는 비가 오면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봤다. 그저 일없이 바라보는 것이..
엄마의 뒷모습. 강호영, 제 5회 일하는 사람 사진 공모전 출처 찌는 듯, 데우는 듯, 불타오르는 듯한 날씨가 다시 시작되려는 조짐인가보다. 새벽부터 빛의 뜨거움이 심상치 않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벌써 내 방까지 볕이 걸어들어와 있었다. '다시 푹푹 찔랑가보다' 어머니는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는 요즘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반바지를 입었음에도 땅을 차고 오르는 빗방울들이 바지를 적셨고 셔츠는 등에 찰싹 달라붙어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거치적 거렸다. 비 내리는 소리가 비 흘러가는 소리로 들렸다. 잠수교는 전날 오전을 시작으로 물에 잠겼고 집 가까운 중랑천이 범람해서 동부간선은 통행금지였다. 이틀 동안 내린 비로 서울은 물에 넘쳐 철철거렸고 나는 그 와중에서 학교에 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