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틈/누군가의 한 소절 (26)
서울남편광주아빠
낙엽이 흔들리는 것에 시선을 두다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낙엽을 쓰고 싶었고 바람을 적고 싶었고 너른 평야와 산과 들, 광대무변한 바다를 옮기고 싶었던 내 글세계에서 나는 갓 태어나 옹알이도 어수룩한 핏덩이였다. 그저 하루를 적어 배설했고 그 내용과 구성의 조악함에 나는 매일을 좌절했다. 내가 본 것들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지, 아니 꼭 말 되어져야 하는데 왜 내 입은 묵언수행 부처처럼 열리지 않는 것인지. 머리가 빠지고 한숨이 깊어지고 발걸음은 무거워만 지는데, 내 머릿속 자판위에 먼지는 쌓여가는데 하릴없이 나는 그저 아득했고 내 풍경은 그저 무심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 동창 두놈과 마주앉은 바람불어 코끝이 찡한 겨울 어느날, 우리는 문을 ..
내가 안개를 본적이 있던가. 서울엔 안개가 없다. 안개는 서울 길바닥에 산재한 꽃집에만 안개꽃으로 존재한다. 내 기억속의 안개는 고향의 안개다. 이른 아침, 아궁이에 장작이 불을 뿜고 솥에서 김이 오를때 나는 고소하고 기름진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깼다. 그리고 부시시한 눈을 비비며 문을 열면 마당엔 온통 안개가 내려있었다. 어디선가 닭울음소리 들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할머니는 밥그릇에 개밥담아 내려놓고 계셨다. 백화가 밥그릇 할짝대는 소리가 꿈처럼 들려오고 아버진 아침부터 온대간대 없었다. 내게 안개는 포근한 솜이불 같았다. 안개 뒤편엔 꼭 아버지가 털털거리는 경운기를 몰고 집으로 오고있을 것만 같았고 우리집 백화 - 녀석의 털빛이 하얀 꽃을 닮았다 하여 할머니께서 지으셨다. 할머닌 4년전에 돌아가셨다..
현실은 늘 질척거린다. 진창 속에 발을 담그고 가뿐 숨을 쉬는 사람들은 오늘을 견뎌내기가 힘겹다. 누군가는 태어나고 또 누군가는 죽어나가는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바람은 불고 비는 내리고 해는 뻘겋게 아가리를 벌리고 떠있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그 발버둥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안쓰럽다. 말 되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말들이 해무海霧되어 그림자를 잠식하고 삶은 그 속에서 연명해 나간다. 나는 현실을 현실로서 받아들이고 되어질 수 없는 것들을 말로써 잡아두려는 어중이다. 그러나 김훈의 글 속에서, 말들은 세계를 해체하고 날아가는 새들을 그저 풍경으로 놔두는 말들이었다. 하나마나 한 말들을 하면서 하나마나 한 삶을 노래하는 김훈의 언어들은 늘 나에게 무서운 집중력을 요구했다. 그의 문장들은 현실 속에 뿌..
바이올렛. 제비꽃. 4 ~ %월에 자주색의 꽃이 잎 사이에서 나온 꽃줄기 끝에 한 개씩 옆을 향하여 피고 열매는 삭과이다. 어린잎은 식용한다. 한국, 일본, 중국, 시베리아 동부 등지에 분포한다. 네이버에 바이올렛을 쳐보니 위와 같은 설명이 나왔지만 무슨 말인지 잡을 수 없이 희미했다. 그저 보라색정도로만 알고 있던 나였다. 보라색.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것 같다. 난 보라색을 그다지 호감있어하지 않는다. 선홍보다 더 피의 본질을 담고 있는 빛깔이어서도 하고 동시에 짙은 블루의 심연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색이었다.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의 색이 보라색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너의 사랑 저편에 만발한 꽃의 색이 아닐까. 확실하게 잡을 수..
김연수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1994년 장편소설[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굳빠이, 이상]으로 2001년 동서문학상을, 소설집[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2003년 동인문학상을,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로 2005년 대산문학상을, 단편소설 [달로간 코미디언]으로 2007 황순원문학상을, 단편소설 [산책하느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으로 2009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 장편소설 [7번 국도][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밤은 노래한다] 소설집[스무 살], 산문집[청춘의 문장들][여행할 권리]등이 있다. 내게 있어 그의 첫 ..
내 안의 욕망이 고개를 드는 순간에 나는 버티기 보다 쉽게 무너져 내렸다. 술자리에서 취기를 이기지 못함에도 계속 술잔에 술을 따랐고, 이른 새벽 봉두난발로 침대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간에 잠을 이기지 못했고, 삶의 곤궁 속에서도 그녀와 방탕한 사랑을 즐겼다. 절제, 인내, 중용의 덕들은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썩은 욕망의 탑이 세워졌다. 나는 쉽게 무너져 내렸다.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반갑게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그 경험이 숨겨야만 하는 경험이고, 그 경험의 치부를 감쌀 포장지가 너무 가볍다 싶으면 경험의 공감대는 거부감을 만들어 낸다. 또 다른 더러운 내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은 내 심장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직접 보는 것처럼 역겹다. 그냥 싫은 것이다. [꽃의 기억]에서 박경진..
또 다시 신경숙이다. [외딴방][엄마를부탁해][깊은슬픔][리진]이후 다섯번째 작품. 외로울 때는 신경숙의 책을 보지 않는다는 한 독자의 이야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더욱더 외로워지기 때문이라는 신경숙의 글들.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뼈에 각인 될 깊은 절망의 기억이 눈을 멀게하고 귀를 멀게하고 나아가 기억 자체를 지워버릴 수도 있게 한다. 나 또한 그 시절의 기억이 또렷하게, 아니 희미하게라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그 시절 그 시간 이후부터 지금까지, 자고 일어났더니 1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버린 것처럼 시간을 멀리뛰어버린 그런 기억들. 아프고 시리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되살아나주지 않는 생각의 뿌리들. 그 기억 속으로 걸어가는 신경숙의 언어들은 여전히 흐리고 멀겋다. 요즘에도 나는 오늘이, 그러니까..
많은 갈림길에서 오직 최악의 길만 골라 갈 때가 네게도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원에서 12시까지 공부하고 2시까지 학원 위층 독서실에서 책보다 집에 오면 아버지는 늘 술에 잔뜩 취해 거실에 앉아계셨다. 불콰해진 얼굴로 전화기를 붙잡고 마구 욕을 해댔다. 누구일까. 아무튼 그분도 참 잘못 걸리신 날이다. 엄마는 내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벽쪽으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잠든척 하고 있었다. 가방을 방안 구석에 내려놓고 늦은 저녁을 먹으려 냉장고 문을 열면 채 치워지지 못하고 층층이 널부러져 있는 반찬그릇들이 보였다. 아. 또 엎으셨구나. 매번 엎어져도 상다리 한번 부러지지 않았던 우리집 밥상. 쉽게 부러질 것이었다면 아버지께서 밥상에 화풀이하지 않으셨을까. 아무말도 하지 않았던 그 새벽에 나는 내..
김인숙 작가의 소개글은 이전 '우연' 평의 것으로 갈음한다. 솔직하다. 빠르다. 거침없다. 종이 이곳 저곳에 상처와 결핍이 스며있고 아픔에 시선을 던지지 않는 듯 하면서도 지독히 바라보는 치밀함. 김인숙의 장편소설 '우연'을 읽고 느꼈던 감정선들이다. 두번째다. 이번에는 '봉지'다. 그전에 내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꺼내자면 네모난 모판이 떠오른다. 오리가 넘는 하굣길을 걸어 집에 오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아빠는 일하러 나갔고 분명 누나들은 할머니와 밭에서 김매느라 땀범벅이었을 게다. 형은..... 기억이 없다. 아무튼 나는 질경이를 뽑아 입에 물고 조물조물 씹어 단물을 짜내면서 엄마를 보러 갔다. 마을 시정을 지나 버스정류소가 있는 마을 외곽까지 걸어가면 동네 냇가 건너기..
장영희 에세이. ('에세이'란 단어가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지 잠깐 생각했다.)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뉴욕 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대에서 1년간 번역학을 공부했으며, 서강대 영미어문 전공 교수이자 번역가, 칼럼니스트, 중·고교 영어교과서 집필자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문학 에세이 [문학의 숲을 거닐다]와 [생일][축복]의 인기로 '문학 전도사'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2003년에는 아버지 故 장왕록 교수의 10주기를 기리며 기념집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을 엮어 내기도 했다. 번역서로 [종이시계][살아있는 갈대][톰 소여의 모험][슬픈 카페의 노래][이름 없는 너에게]등 20여 편이있다. 김현승의 시를 번역하여 한국문학번역상을 수상했으며,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으로 올해..